짧은 리뷰
나는 좀처럼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밝은 얼굴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시궁창 같은 현실에 눈감거나 외면하는 이들이 많다. 당연히 세상의 어두운 면을 지운다면 밝고 희망찬 것들만 남겠지. 그런 희망은 사기꾼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찬가지로 절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맞고 옳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염세적이고 비관적이기만 한 이들은 절망을 말하며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만을 과시하고 싶을 뿐, 사람들의 실제 삶에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절망 속에서 일어서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비웃기도 한다. 모든 노력이 의미 없다는 듯이, 자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한 그런 비웃음. 하지만 사람들은 절망의 본모습을 몰라서 노력하고 애쓰는 게 아니라는 걸 절대로 모르는 헛똑똑이들이다.
전자든 후자든 뭔가를 좀처럼 하지 않고 입만 턴다. 희망 사기꾼들은 문제를 가리는 방식으로, 절망 추종자들은 문제를 그대로 두는 방식으로 입만 털뿐, 문제를 마주하거나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사람들보다 절망에 맞서서 희망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고 분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는 절망적인 현실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며 희망을 말하는 사람, 희망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며 절망을 직시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책으로 치자면 후자는 서경식 선생님의 책이고, 전자는 김중미 선생님의 책이다.
김중미 선생님의 <느티나무 수호대>를 읽는다. 솔직히 말하면, 내 책 북토크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야기 손님으로 김중미 선생님을 초대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내가 처음 읽은 김중미 선생님 책일 거다. 워낙 유명한 책이지만, 그리고 김중미 선생님이 전쟁없는세상을 후원해 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챙겨 읽지 않다가 감옥에서 읽었다. 그리고 출소한 뒤에는 <꽃섬고개친구들>을 읽었다. 이 책 주인공 중 한 명이 병역거부를 하기 때문에 일부러 챙겨 읽었다. 그 뒤로 <조커와 나>, <곁에 선다는 것>을 읽었고 <너영 나영 구럼비에서 놀자>는 내가 출판사 다닐 때 편집자로서 원고를 읽어 갔다.
김중미 선생님의 책은 굉장히 투박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던진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계몽적이거나 교훈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시로 치자면 김남주 시인의 시처럼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차이가 있다면 김남주 시인의 언어는 전투적이라면 김중미 선생님의 언어는 따스하고 포용적이다.
우리는 오래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기대거나 일방적으로 빼앗기보다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며 살아왔다. 위기가 닥치면 나 이외의 존재에게 더 집중하고 살핀다. 위기일수록 이웃과의 협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들만큼 슬기롭고 이타적인 존재는 드물다. 내게는 그것만이 희망이다. (180쪽)
나는 아직도 절망보다 희망을 더 믿는다. 여전히 사람들 안에 살아 있는 생명의 힘을 믿는다.(<느티나무 수호대> 띠지 문구)
만약 김중미 선생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말들을 했다면 나는 희망팔이하는 사기꾼 취급을 하거나, 하나마나한 공자님 말씀이라고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말들은, 사회과학서적에나 어울법한 선언적인 말들은 듣기에는 좋지만 현실에선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이 말들은 소설가이기 이전에 '기차길옆작은학교 큰 이모 김중미'를 통해 나왔기 때문에 무척이나 힘이 세다. 선생님이 삶이, 그가 해온 빈민운동이 이 말들에 힘을 불어넣는다.
김중미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아주 구체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처한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이며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폭력과 차별, 혐오를 그들도 함께 겪는다. 김중미 월드의 인물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세계를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데 그것이 위선적이라거나 무의미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현실성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절망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면서도 그에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김중미 선생님과 이웃들의 모습이 그 인물들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김중미 선생님들의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과 현실적인 문제를 다뤘는데 <느티나무 수호대>에서는 처음으로 동화 같은 공간, 동화 같은 설정이 나온다. (여기서부턴 스포일러 있음) 예전에는 주로 농사를 짓는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였지만,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고 다양한 나라 출신들이 모여사는 대포읍의 당산나무와 그 마을에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느티샘은 원래는 당산나무인 느티나무다. 당산나무가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해서 느티샘이 되었고, 대포읍에서 가장 연약한 이들을 돌본다. 느티샘 덕분에 함께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깨우친 아이들은 재개발 때문에 당산나무가 위험에 처하자 느티샘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해나간다. 각각 아이들의 사연과 이들이 연결되는 모습들, 그리고 당산나무를 살리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소설의 주요 줄거리다.
나무가 사람 모습으로 현현해서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은 느티나무 안에 모여서 함께 밥을 먹고 논다는 설정만 보면 판타지 소설이다. 그렇지만 아이들 각각의 사연-부모님이 중국 출신으로 코로나 이후 중국사람들이 코로나의 발원지라는 소문과 편견 때문에 차별을 겪는 금란이네,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지만 아프리카 출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검은 피부 때문에 놀림받고 아프리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에 상처받은 니카와 요한 형제, 베트남에서 살다가 엄마와 함께 한국에 와 말도 안 통하고 친구도 없어 외로웠던 민용 등등-과 느티샘이 처한 재개발이라는 위험상황 등, 등장인물들이 겪는 어려움을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판타지라는 생각이 잘 안 들기도 한다.
어쩌면 김중미 선생님은 이번 소설에서는 조금 더 희망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런 판타지적인 요소를 집어넣은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 책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출간 기념 북토크에 김중미 선생님을 이야기 손님으로 모신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희망에 대해 말한다는 것의 의미, 희망을 이야기하는 방법에 관해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 2년 반이 넘어가고,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 이후 이스라엘의 끔찍한 보복 학살이 지속된 지도 1년이 다 되어 간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반대하지만 전쟁은 줄어들기보다는 더 늘어나고 더 확대되는 모양새다. 끔찍한, 그리고 거대한 전쟁 앞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마주하기 쉬운데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저항을 찾기 위해서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더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하면 이 글 맨 처음에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기꾼의 언어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절망적인 현실에 잠식당하지 않으면서도 평화에 대한 희망을 상상하기. 나는 이것이 단순히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쟁없는세상 같은 평화운동, 활동가들의 역할은 평화가, 희망이 단순한 선언이나 바람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과학이나 논리, 합리, 이성 이런 것들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을 사람들은 분명히 갈망한다. 이때 사람들의 갈망을 채워주는 것이 음악, 문학 같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운동이 희망을 보여주는 방식과 문학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분명 다르겠지만, 그 둘 사이를 잘 연결할 수 있다면 무척 큰 시너지가 발생하지 않을까? <느티나무 수호대>를 읽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