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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pr 24. 2020

'창살에 햇살이'를 라디오에서 들으며

김남주, 내게 혁명을 가르쳐준 시인


며칠 전 오랜만에 밤 열두 시에 CBS 라디오를 틀었다. 원래 이 시간에 하던 프로그램이 사라졌는지 새로운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새 DJ가 박준 시인이었다. 시처방? 정확히 이름이 생각나지는 않는데 사람들이 보낸 사연을 소개하며 마치 처방전처럼 사연의 주인공에게 시를 하나 낭독해 주었다. 그날 낭독해 준 시는 김남주의 '창살에 햇살이'였다.


바로 레인보우 어플에 사연을 남겼다. '창살에 햇살이' 나도 무척 좋아하는 시라고. 특히 감옥에 있을 때 많이 읊었던 시라고, 병역거부로 감옥에 갔었다고. 예전에도 여러 번 라디오에 병역거부로 감옥 다녀온 사연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중 몇 번은 사연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감옥'이라든지 '병역거부'와 같은 단어는 삭제된 채 소개되었다. '쳇, 전과가 무슨 흉인가, 병역거부가 부끄러운 일인가. 사연 소개를 말지 왜 가장 중요한 내용만 쏙 빼고 이야기를 해' 빈정 상했다. 그런데 라디오 DJ가 착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내가 쓴 거의 그대로 읽어주는 게 아닌가.


저도 옥에 다녀왔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입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뭔가 내 삶이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헌법재판소에서 대체복무 규정 없는 병역법은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릴 때도 이런 감흥은 없었는데, 나의 감옥살이와 평화운동이 제대로 된 인정을 받는 기분이 들어 한밤중에 울컥했다.


김남주의 시에 안치환이 곡을 붙인 '저 창살에 햇살이'도 신청했는데 신청곡은 안 틀어줬지만 괜찮다.




김남주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다. IMF 시기였다. 어느 날부턴가 아빠가 일을 나가지 않았다. 실직한 거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대답하셨지만 나는 거짓말인 걸 알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망해버린 유망한 중소기업 사장님들 소식을 뉴스에서 볼 수 있던 시절이니, 실직은 너무나도 흔해빠진 일이었다. 사람들이 대체로 지쳐있거나 힘든 표정으로 버티던 시절이었다. 동네에 문 닫는 식당이 늘어나고 그 자리에 저렴한 안주와 소주를 파는 허름한 술집들이 들어섰다.


나와 동생은 다니던 학원을 다 끊고, 나는 독서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도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독서실과 집으로 이어지는 지루한 일상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꽉 막힌 독서실에서는 당최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아침 일찍 독서실에 가서 만화책을 보고, 소설책을 읽다가 11시 조금 넘으면 독서실을 나섰다. 조금 산책한 뒤 오락실에 들러서 철권이나 1945를 한 판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순발력이 필요한 게임은 잘하지 못한다. 철권은 1분도 안 되어 끝났고, 그나마 1945는 몇 분은 버텼다. 게임이 끝나면 점심 먹으러 집에 갔다. 여느 때처럼 게임을 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라디오에서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니. 지금 들으면 '뭐 이리 손발 오그라들게 가사를 썼어'라고 생각했을 텐데, 당시에는 그 말이 그렇게 희망차게 들렸다. 둘러보면 다들 얼굴에 근심 걱정 한가득인데, 그렇지만 이 모든 사람들이 꽃보다 아름답구나, 그런 희망. 나는 당장 레코드 가게에 가서 안치환의 앨범을 샀다.


안치환 5집 CD 커버 이미지. 내가 샀던 안치환 5집 테이프의 실물 사진을 찍고 싶은데 못 찾겠다.


집에 와서 테이프를 틀고 앨범을 살펴보는데 유독 여러 번 반복되는 이름이 있었다. 김남주. '희망이 있다(원작 시: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아이고! I GO!(원작 시: 날마다 날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야' 이 세곡의 노랫말이 김남주 시인의 시라고 적혀있었다. 문학 과목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의 시인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게다가 시 제목들이 뭔가 다른 시들과는 색다른 느낌을 줬다. 동네 서점에서는 김남주 시인의 시집을 찾을 수 없었고 나는 큰 맘먹고 잠실 롯데백화점까지 나가서 김남주 시집을 사 왔다. 아빠의 실직으로 우리의 용돈도 대폭 삭감되었으니, 왔다 갔다 교통비와 시집까지 당시 나에겐 꽤나 큰 지출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시집을 읽는데,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사회 참여 시인이라고 해봤자 이육사나 윤동주만 알고 있던 시절이니,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 정도로도 대단한 사회 비판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김남주의 시는 굉장히 거칠고 투박했다.  <전사>, <학살>, <나의 칼 나의 피>, <자유>, <자본주의>... 제목들부터가 멋이라곤 하나도 부리지 않은 무슨 사회과학 개념어 사전 목차 같았다.(물론 나는 고등학생 때 사회과학이라는 단어 자체를 몰랐다.) 안치환 앨범에 실린 시들 제목은 그나마 멋들어진 제목이었던 거다. 시의 내용과 형식은 제목보다 더 파격이었다. 김남주의 시는 거침이 없었고, 펄펄 끓었으며, 무엇보다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었다.


바티스타, 소모사, 팔레비, 마야코프스키, 하이네, 브레히트, 생전 처음 듣는 이름들이 난무했고, 교조주의니, 전향이니, 관료주의 같은, 당시로서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단어들이 잔뜩 있었지만, 나는 김남주의 시에 깊이 빠져들었다. 감옥에서 우유갑 속 은박지에 못으로 눌러 시를 썼다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쓴 게 아니라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시를 썼다는 이 혁명가의 시는 펄펄 끓는 에너지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주체할 수 없던 내게 구원의 빛처럼 느껴졌다.


나도 김남주처럼 혁명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썩어빠진 세상을 뒤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혁명가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얼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사실 혁명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만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만은 뚜렷했다. 우리 아빠는 그래도 평생을 부지런히 일했는데 갑자기 실직자가 되어 식구들한테 미안해하고, 어느 재벌집 갓난아기는 태어나자마자 통장에 몇십억이 들어 있고. 이런 세상을 용납할 수 없었다. 사회과학이란 게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 김남주의 시는 혁명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대학에 가서 학생운동을 하고, 학생운동을 하다가 병역거부를 알게 되고, 평화활동가가 되었던 그 시작에 김남주가 있다. 김남주의 시 때문만은 아니지만, 김남주의 시를 따라가며 나는 활동가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지금의 나는 김남주의 시를 보며 예전 같은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혁명에 대해, 사회운동에 대해 김남주의 시와는 다른 생각을 한다. 혁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사회운동을 어떤 소명의식이나 책임감만으로 해나가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분 일초를 어기지 않"(전사1)는 것이 중요하지만 살다 보면 5분에서 10분 정도 늦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쩌다 앞의 일정이 길어지면 30분도 늦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나기로 한 사람들에게 제시간에 사정을 알리고 미안함을 표시하는 예의만 지킨다면. "철의 규율과/불굴의 의지로 단련된 바위"(투쟁과 그날 그날)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대신 진지한 내용을 여유 있게 이야기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유머러스하게 하며,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돌멩이 하나)고 생각하지 않고 같이 살아갈 친구들에 고마워한다.


혁명가를 꿈꾸었던 나는 지금은 활동가를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통해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고, 자아실현도 하고, 관계를 맺고, 소속감을 느끼고, 사회에 기여하는 그런 수많은 직업 가운데 하나. 그 수많은 직업 가운데 내가 가장 재밌게 할 수 있고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직업. 오랫동안 활동가로 살고 싶다.


2020년의 나는 여전히 "아픈 다리 서로 기대어 가"(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는 것이 사회운동이라고 생각하지만 김남주의 어떤 시들에는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래도 나는 기억한다.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는 시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혁명가를 꿈꾸었던 청소년 시절의 나를. 감옥 안에서 "내가 볼을 내밀면 /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을 조용히 읊조렸던 2006년의 나를. 따뜻하게 기억한다. 내 보물 같은 시집과 함께.


 

아마도 1998년에 이 책을 샀던 거 같다. 권 당 4000원, 두 권짜리 시집. 판권을 보니 1994년에 인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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