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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l 10. 2020

두 사람

병역거부와 계급 혹은 학벌

7월부터 대체복무 신청이 시작되었다. 언론 기사를 보면 신청 시작 이틀째까지 스무 명 남짓 신청한 거 같다. 2018년 6월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 없는 병역법이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 재판 중이던 병역거부자들이 우선적으로 심사를 받을 거라고 한다.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에 입영영장을 받았다가 연기한 사람들과 원래 지금 시점에서 입영영장을 받는 사람들까지 더하면 대체복무제 실시 후 1~2년 동안은 심사를 기다리는 시간도 상당할 것 같다. 신청자는 본인 진술서, 부모 포함 주변인 3인 이상의 진술서, 초중고 생활기록부 사본 등 꽤 많은 필수 제출 서류를 입영일 5일 전까지 제출해야 한다. 처음 시작되는 제도라 신청자들도, 담당 공무원들도, 그리고 나를 포함한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다들 혼란스럽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체복무 신청을 준비하는 이들이 전쟁없는세상으로 상담을 요청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번 주에 2명의 병역거부자를 상담했는데 이 두 상담이 내게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이를 기록하고 싶어서 쓴다.


A와 B의 경우

A는 연구자였고 예전부터 병역거부를 하기 위해 착실하게 준비해왔다. 자기 진술서를 이미 다 써서 전쟁없는세상 활동 관련 부분에서 잘못된 것이 있는지 검토해달라고 메일을 보내왔다. A가 쓴 진술서는 꼼꼼했다. 언제부터 어떻게 병역거부를 고민해왔는지, 병역거부를 결심하는 동안 어떤 고민을 해왔는지, 그 기간 동안 어떤 활동을 했는지가 시간 순으로 육하원칙에 입각해 논리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각각은 필요한 증빙 자료(이메일, 카톡, SNS 기록 등등)가 첨부되어 있었다. 자신이 참여한 활동들, 자신이 했던 말과 썼던 글의 맥락이 아주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증빙자료를 빼도 무려 A4 7장짜리 기록이었다.

B는 얼마 전 전쟁없는세상으로 메일을 보내왔다. 병역거부를 어떻게 하는지, 하면 어떤 절차를 거치게 되는지 물어왔다. 대체복무 신청 서류 제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그는 살아온 이야기를 했고 사정이 딱했지만, 여러 모로 심사 통과가 쉽지 않아 보였다. 병역기피로 몰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딱히 물어볼 곳이 없는 그는 자기 진술서를 쓰는 동안에만 나에게 수차례 전화를 해서 도움을 구했다.

(A와 B 둘 다 내가 잘 아는 이는 아니고 심지어 B는 이번에 처음 봤으니, 둘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병역거부자로서 대체복무 심사를 준비한 상황에 대한 진단만을 담았을 뿐 가치 판단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둔다.)  


나의 경우

B를 상담한 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고작 1시간 남짓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두통과 함께 신열이 났고 몸은 탈진한 것처럼 무거웠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내 경우와 겹쳐보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병역거부를 지지해주는 친구들과 동료들, 단 한 번도 군대 가라는 말을 한 적 없는 부모님. 그런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청서를 이렇게 저렇게 쓰시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심사에 통과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통과할 가능성은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병역브로커가 아니고 활동가니까. 통과하기 위해 스스로를 불쌍하게 보이도록 하자는 말을 나는 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 그가 통과하게 돕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는지. 운동의 대의 같은 거는 나한테나 중요한 것이지 다른 이들에게도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잖은가. 그렇다고 내가 무슨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무조건 군대만 안 가면 장땡이라는 생각으로 조언을 해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한 번 더 휘저어 놓았다.


전쟁없는세상의 경우

그동안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병역거부 운동의 여러 한계를 이야기해왔는데 그중 핵심적인 것이 병역거부 운동 내부의 젠더 역할과 계급이나 학벌의 문제였다. 전자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이 글에서는 생략(이 내용은『병역거부 - 변화를 위한 안내서』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한다. A와 B의 상담에서 내가 느낀 것은 후자의 문제였다. 사실 나도 그렇고 다른 동료들도 잘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 병역거부는 상대적으로 가방끈 긴 이들에게 가까운 저항 방식이었다.

 '양심'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심지어 병역거부자 자신도 명확하지 않은 추상적인 관념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설득하는 일은 누구도 쉽지 않다. 군대 가는 것이 기본값인 사회에서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논리와 합리성과 근거를 갖춘 주장을 펼쳐야 하는데, 아무래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A 같은 병역거부자들은 전쟁없는세상의 도움 없이도 논리적으로 완벽한 진술서를 써내지만 그렇지 않은 B 같은 사람들은 진술서를 쓰는 행위 자체가 너무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단순히 논리적 완결성이나 글솜씨의 문제도 아니다. A는 이미 오래전부터 병역거부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왔다. 진술서에 쓸 수 있는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반면 B는 고민한 세월은 길었지만 딱히 진술서에 채워 넣을 삶의 궤적이 마땅치 않다. 이는 병역거부에 대한 정보값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A는 같은 학교에 병역거부자가 있었다. 병역거부자 혹은 병역거부 운동을 접할 기회가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더 폭넓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병역거부 심사에 필요한 여러 준비를 미리부터 할 수 있다. 반면 평소에 병역거부자나 평화활동가를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모른다. 초창기 병역거부자들이 주로 학벌 좋은 대학을 나왔고 평화활동가들 또한 많은 이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학을 나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병역거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학벌이 아주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특히 부자들이 더 좋은 학력을 획득하기 쉬우니 이는 계급 문제기도 하다.


병역거부 운동의 이런 한계점에 대해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온몸으로 겪으니 머리가 멍해져 버렸다. 모두가 감옥 가던 시절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병역거부 운동 내부의 격차를 새삼 발견하게 된다. 아니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체감의 정도가 확연하게 다르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질문이 떠나질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병역거부 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나? 당장 B 같은 병역거부자들에게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B를 만나고 나서 내가 느낀 감정, 좌절감과 무력감, 혹은 아픔은 단순히 나의 처지와는 다른 그의 처지에 대한 감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 차별과 불평등한 구조 앞에서 지금 나는, 전쟁없는세상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내 감정, 느낌, 생각이 잘 정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록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주 내가 몸이 느낀 감정과 생각과 고민을 까먹게 될 테니까. 아마 앞으로 반복적으로 겪어야 할 텐데, 그때마다 기록을 살펴보며 조금씩 생각과 고민을 진전시켜 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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