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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l 31. 2020

참을 수 있는 '양심'의 가벼움

진정한 양심의 자유 보장을 위하여 

다들 그러하겠지만 나도 평소에 신문 기사를 보거나 소설, 영화를 볼 때 내가 관심 갖고 있는 단어나 상황에 더 눈이 가곤 한다. 전쟁없는세상에서 18년째 병역거부 운동을 하고 있으니 내 경우엔 모든 텍스트에서 혹은 작품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를 만나거나, '양심의 자유'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상황에 시선이 머물고 생각이 깊어진다. 요 며칠 동안 본 기사 중에 유난히 두 기사가 기억에 남았다. 



양심을 지킨 대가 


9년을 바친 경력이 무용지물 될 위기지만, 그는 “소신에는 대가가 따르지 않겠느냐”며 씁쓸하게 웃었다.


한국일보 김지은 기자가 쓴 기사 [지평선] 방조자와 조력자의 미래에 실린 '문 선배'의 말이다. '문 선배'는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지은 씨가 JTBC 뉴스룸에서 안희정 지사가 저지른 성폭력을 고발했을 때, 처음으로 먼저 나서 도와준 내부 동료라고 한다. 성폭력 피해자의 편에 섰던 문 씨는 결국 그 바닥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안희정 지사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던 동료들은 영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문 씨의 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이것은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20여 년을 양심적 병역거부 활동을 해왔으니 모든 게 양심의 문제와 연관되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양심의 문제를 떠올린 것은 문 씨의 저 말 때문이다. 자신이 입을 손해와 피해를 문 씨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김지은 씨가 겪은 일을 모른 척하는 것은, 김지은 씨가 앞으로 겪을 일을 외면하는 것은 그의 양심이 허용하지 않았으리라. 문 씨의 행동이 양심에 따른 행동이라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 



양심을 지키지 못한 대가 


바보가 됐어요. 부끄러워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는 거예요. 또 사람들을 만나도 입을 열 수가 없는 거예요. 자존감이 높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행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내가 사라져 버린 거예요.


경향신문에 실린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구술기록에 대한 기사에서 기록자이면서 인터뷰이로 참여한 유해정의 말이다. 유해정 활동가를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가 과거 학생운동 할 때 남영동 대공분실에 잡혀간 뒤 한총련 탈퇴서를 썼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겨우 숨만 쉬고 살다"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동을 시작했다는데, 나는 그의 강인한 이미지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탈퇴서를 강제로 쓸 때의 마음이 어땠을지, 그 이후의 삶이 어땠을지 저 이야기를 듣고도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한총련 탈퇴서를 쓰고서 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을 본 적 없다는 유해정의 말이 가슴 아프다. 양심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은, 평생의 상처로 남는다.  



양심에 대한 지독하고 가혹한 판단 기준


헌법재판소에서는 양심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양심이란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


무척 의미 있는 정의지만, 좀 더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을 보면 헌법재판소에서 정의 내린 의미보다 훨씬 더 무겁게 양심의 의미를 다룬다.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추정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양심과 어긋난 행동을 한 경우에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망가진 것을 증명하라고 한다. '강력하고 진지한' 것을 넘어서서 고정불변의 절대적 계율처럼 양심에 복무해야만 병역거부로 인정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니 병역거부자들이 아직 고민이 영글지 않았던 시절 쓴 글이나 했던 말의 한 구절을 트집 잡거나 대학 시절 다양한 고민 속에서 공군이나 카투샤를 지원했던 경력을 문제 삼는다. 심한 경우는 입영영장을 연기한 것조차 양심을 의심하는 이유가 된다. 평화주의 신념이 있었다면 입영영장이 나왔을 때 왜 바로 병역거부 하지 않았냐, 연기를 했기 때문에 너의 양심은 가변적이고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양심을 지키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야 


양심을 지키는 것도, 양심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개인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크다. 양심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모든 이의 권리로 자리잡지 못했다. 한국일보 기사에 실린 문선배의 이야기처럼 직장인들이 일상에서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에도 우리의 양심은 작동하기 마련이지만, 감옥마저도 감내하는 비전향 장기수나 병역거부자들처럼 어떤 특별하고 특수한 사람들의 인권 문제로만 양심이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조차도 가혹하고 지독한 잣대를 들이대 양심을 판별하고 선별하고 재단하고 규정해버린다.


나는 '양심'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훨씬 더 가벼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정말로 양심의 자유가 모든 국민의 실질적인 권리가 될 수 있다. 양심을 지킨 대가가 감옥행이거나 9년의 경력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어선 안 된다. 그래서는 대부분은 과거 유해정 활동가처럼 양심을 외면하는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고, 그 결과로 고통과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게 된다. 


대단한 신념을 가지지 않아도, 특별한 결심을 하지 않아도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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