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감각
엄마는 종종 내게 미안해했다.
"엄마 아빠가 부자였음 다른 집 자식들처럼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그랬을 텐데..."
난 정말이지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미안한지는 알겠는데, 대체 그게 왜 미안할 일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대학까지 졸업한 성인이 무슨 부모님 돈 없다고 어학연수 못 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가정형편이 여유가 있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고려했겠지만, 정말로 내가 가고 싶었다면 가정형편과 상관없이 길을 찾아봤을 것이다. 엄마가 왜 미안해하시는지는 알겠는데, 그게 대체 왜 미안할 일인지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집이 부자면 어떨까 상상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한때는 부모가 부자여서 생계비 걱정 안 하고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어떤 경우는 부모가 많이 부자여서 생계비뿐만 아니라 사무실까지 뚝딱 마련해주곤 하는데, 그러면 나와 내 친구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봤다. 그렇다고 부자가 아닌 부모님을 원망할 일은 아니다. 부모가 부자가 아니라고 부모를 원망한다면 그것만큼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마냥 부러워하기엔 내 상황도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우리 집은 부모님이 부자는 아니었지만, 내가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악하지도 않았다. IMF 직후 대학을 다녔는데, 등록금이 없어서 학자금 대출을 밥 먹듯이 받았지만 그때는 많이들 그랬고, 내 학자금 대출은 결국 부모님이 다 갚아주셨다. 지금도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지만 그런 형편이라 한들 내가 그걸 바라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삶도 독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럴싸하게 말했지만, 결국 부모님한테 생계비 받으면 그만큼 잔소리도 받아야 할 테니까.
그리고 어떤 친구들은 부모님이 아프거나 경제 능력을 상실하셔서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애들도 있는데, 나는 온전히 내 한 몸 밥벌이만 신경 쓰면 되는 상황이니 이만 해도 어딘가 싶다. 부모님께서는 서운하실 수도 있지만 부모님의 노후를 내가 책임질 경제적 능력이 안 되니 나에게 기대하지 마시고 행여 나한테 돈을 주거나 어학연수비 줄 생각도 마시고 부모님 노후 대책 스스로 마련하시라고 했다. 아직 두 분 다 건강하시고 대단한 건 아니라도 노동도 하시니, 이만하면 나는 상황이 아주 좋은 편이고 부모님의 건강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돈과 연관되어 활동가 친구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집 문제다. 서울에 거주하는 친구들의 경우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임대료에 치이고 2년마다 돌아오는 재계약 기간에 집주인이 갑질 할까 노심초사한다. 내 주변에도 전셋집이 경매에 넘어가서 맘 졸이거나 거의 전세 사기를 당했거나 당할 뻔했던 사람들이 여럿이다. 모두들 저축은 언감생심 꿈도 안 꾸고, 못 꾸고 그저 집 한 채 고수하기 급급할 뿐이다. 나는 내 친구들에 비해 돈이 더 있지는 않지만 운 좋게도 10여 년 전에 임대아파트에 들어왔고, 20년을 더 살 수 있다. 물론 파주라서 전쟁없는세상 사무실까지 오가는데 교통비가 많이 들지만 서울에서 집을 구했다면 더 좁은 집에 살면서 교통비보다 더 많은 돈을 냈어야 할 거다. 오가는 시간도 많이 쓰게 되는데, 모든 걸 다 만족할 순 없다. 쫓겨날 걱정 안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활동가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아마 단체의 예산을 마련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예산이 부족하면 사업을 본래 하고 싶던 대로 하지 못하고 축소해서 하거나 취소해야 하고, 인건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된다. 활동가들은 인건비, 사업비를 확보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으고, 각종 지원사업에 기획서를 보내고, 상금이라든지 민간 재단 펀딩에 신청서를 내고, 정부나 지자체의 프로젝트 사업을 따내려 애쓰는 활동가들도 있다. 그러다 보면 내가 활동을 하기 위해 예산을 모으는 건지, 예산안을 모으려고 활동 기획서를 짜내고 있는 건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올해 들어 나도 펀딩 신청서, 각종 상금 지원서를 수차례 썼다가 대부분 떨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서류 작업은 지겹긴 하다. 선정이 된다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내가 쓴 지원서/신청서 중에 올해 딱 하나 선정되었는데, 영광스럽게도 노회찬상이었다. 막대한 상금과 대단한 명예가 주어졌다.)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지겨움의 크기도 늘어난다. 그나마 전쟁없는세상은 예산을 위해 없는 사업 만들어 신청하지는 않는 편은 아니고, 지원서 쓰는 실무자들이 모두 자신이 기획한 사업으로 지원서를 쓰니 지겨움이 상대적으로 덜할 뿐이다.
헌데 나는 이 지겨움이야말로 중요한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김훈 작가의 에세이집 제목이기도 한 '밥벌이의 지겨움'이야말로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늘 겪는 감각이다. 활동가라고 다를 리 없고, 활동가들이니까 달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운동이 스스로를 골방에 가두고 세상과 동떨어져 관념적인 주장을 내세울 때는 이런 보통 사람들의 감각과 괴리된 경우일 때가 많다. 일상의 지겨움, 밥벌이의 지겨움, 활동가의 경우엔 예산 만들기의 지겨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겨움에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을 하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다. 엘리트 출신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하는 서민 코스프레를 상상해 보면, 보통 사람들의 감각이 결여된 캠페인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 수 있다. 당사자만 비장할 뿐이다.
그렇다고 나는 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찬양해야 하는 대상, 혹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고, 그럴 때 우리는 그것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말은 쉽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많은 활동가들이 이걸 몰라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다. 당장 인건비와 사업비가 없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내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전쟁없는세상은 가난하지만 당장 거리에 나 앉을 상황은 아니고, 우리의 가난은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적어도 계획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밥벌이의 지겨움을 탈출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또한 예산 마련의 지겨움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 나쁜 짓 안 하고 부자 될 수 있으면 좋지, 거절할 필요가 없다. 다만 부자가 되기 위해 크게 애쓸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억지로 지겨움을 유지하거나 가난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것과 별개로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돈이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고, 더 잘해볼 수 있는 길이 여러 개 생기는 게 현실이니까.
밥벌이의 지겨움을 의무로 여길 필요도 없고, 탈출하고 극복해야 할 무언가로 볼 필요도 없다. 지겨움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를 곱씹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겨움을 모르는 이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나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난 부자가 아니라도, 아니 부자가 아니어서 더욱 괜찮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니, 청계천8가 노래가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