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낭만이란 배를 타고 떠나갈 거야

by 순간

작년 10월쯤이었나,

1년 정도 만남을 이어가던 여자친구와 이별을 하고 같이 가기로 했던 제주도의

비행기 티켓을 끊은 직후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별 기대 없이 그저 하루를 보내기 바빴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여행길에 올랐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 정신없이 놀기보단 그저 쉬다 오자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다.


그 해, 제주도의 겨울을 그리 춥지 않았다.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던 나로서는, 그곳의 겨울이 시리도록 차갑길 바랐다.

하지만 12월의 제주는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마치 내 마음을 위로라도 하는 듯이.


제주도 하면 게스트하우스지,라는 생각으로 2박 일정을 다 다른 게스트 하우스에 묶게 되었다.

저녁부터 시작하는 파티엔 100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어색하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었기에 첫날은 그저 밥을 먹고 술을 조금 마시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지나고, 이른 아침부터 핸드폰에 연락이 수십 통 쌓였다. 무안항공 참사가 일어났던 아침이었다.

안타까운 마음도 잠시, 전 날 마신 술에 숙취가 심하게 올라왔다.

걱정스러운 연락에 예상보다 일찍 일어난 것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했다.


쓰린 속과 마음을 해물라면으로 달래며 다음 숙소로 이동을 했다.

이튿날 숙소도 역시 게스트하우스였고, 거기엔 전 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다.


그곳에서 나는,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발견했다.

나보다 연상이었지만 나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 외모에 춤을 잘 추던 그녀였다.

파티의 1차에선 자리를 옮길 수 없었기에 그저 신기하게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2차로 옮겨간 후에는, 홀린 듯이 그녀의 앞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몇 번의 눈 맞춤, 약간의 호구조사가 지나고 나서부터는 기억이 잘 없었다,

아마 전 날 마신 숙취가 갑자기 올라온 탓이었으리라.


다시 정신이 들고 보니 어느새 사람들은 많이 빠지고 나는 그녀와 단 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상술에 빠져서 비싸게 술을 마시고 있는 날 보며 그녀는 호구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당신과 술을 마실 수 있으면 그깟 호구쯤이야.라고 대답하곤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술자리 플러팅이라고 하는 초코우유를 빌미로

그녀와 밤 길을 걸었다. 제주의 밤은 어둡고, 조용하고, 길었다.

공기가 차다며 그녀가 걸치고 나온 아이보리색 노스페이스 눕시는 그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술기운에, 부끄러운 마음에 볼이 두 배는 더 빨개진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아는 건지, 그녀는 내 얼굴이 빨가다며 날 놀렸다.


그 후로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잠에 들었다.

어떤 상상을 하든 자유겠지만, 우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그저 잠에 들었다.

그렇게 따스한 포옹으로 서로의 온기만 나눈 후에,

각자 준비하고 점심엔 갈치조림을 먹으러 가잔 인사말을 뒤로하고 서로의 숙소로 돌아갔다.


유독 길게 느껴졌던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녀의 SNS 계정을 보며, 연락을 할까 말까 여러 번 고민했다.

이런저런 서로의 사정들을 기억하기에 끝내 연락하지 않았다.

그 사이 그녀의 계정은 비공개 계정이 되었고, 어느새 팔로우는 끊겨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글을 읽으며 코웃음 칠 지 모르겠다.

누구는 속된 말로 '찐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씩 그때 일을 생각하면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라는 곡이 생각난다.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을 새겨요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꽂고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유난히 따뜻했던 제주의 겨울과

추운 맘을 따스하게 안아준 그녀를 떠올리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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