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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초 Mar 05. 2023

회색 눈동자를 가진 내 인생 첫번째 친구

미국에서 사귄 BFF (Best Friends Forever)

오래 전이지만, 초등학교 시절 미국에서의 생활을 회고해보고자 한다. 언젠가부터 미국에서 보낸 짧은 시간은 나의 유년기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때의 강렬한 기억들을 차근히 글로 풀어보고자 한다.




미국에 가서 새학기를 시작한 나에게 모든 것은 낯설었다. 첫 날 식판에 점심을 담아 먹고 나서 긴장하고 어리둥절한 나머지 식판을 퇴식대가 아닌 쓰레기통에 통째로 넣어버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물론 다른 친구들이 하는 것을 보고 다시 꺼내어 퇴식대에 놓았지만 말이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도록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바로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직도 내가 고마운 마음과 함께 기억하고 있는, 나의 미국 생활을 도와줬던 사람들이 여러명 있었다. 따뜻하지만 카리스마 있었던 캄보디아계 담임 선생님, 내가 영어 책에 처음 재미를 붙이게 해준 영어 과외 선생님, 그 밖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나의 인생 첫 친구 Heather이다. 그녀는 주황에 가까운 금발머리 (Strawberry Blonde), 회색 눈동자, 그리고 매우 밝은 미소를 가진  친구였다. 어릴 때의 나는 (그리고 지금도) 남을 웃겨주고 싶은 욕구가 많아 시도때도 없이 농담을 터뜨리는 아이였는데, Heather는 내가 별로 재미없는 농담을 해도 호탕하고 밝게 웃어주었다. 


당시 학교에서 아이들 사이에서는 Fruit by the foot이라는 간식이 유행이었다. 이 간식은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등의 여러 색상이 블렌딩된 길다랗고 얇은 젤리가 종이위에 붙어있었고, 줄자 모양으로 말려 있었다. 조금씩 뜯어먹으면 입 안에 상큼하고 달달한 과일향이 가득 퍼졌다. 아이들은 한 아이가 Fruit by the foot을 먹고 있으면 본인도 작은 조각을 떼어달라고 하며 서로 나눠 먹고는 했다. 하루는 내가 Heather이 Fruit by the foot을 먹는 것을 보고는 “Can I have one?”이라고 물었다. 그녀는 0.01초간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먹고 있던 것을 나에게 통째로 건내주었다. 알고 보니 조금 뜯어서 달라고 요청하려면 “Can I have some?”이라는 표현 또는 “Can I have a piece?”라는 표현을 썼어야 했는데 “one”이라고 물어봤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젤리를 통째로 준 것이었다. 나는 팔을 내저으며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작은 간격을 만드는 모션을 취하곤 그녀에게 간식을 돌려주었고,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큼직한 조각을 떼어내 나에게 건내주었다. 


미국에서 자주 먹었던 Fruit by the foot


그 날을 계기로 우리는 조금씩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고, 금새 가까워지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Hedi (Heather의 줄임말)와 Mimi (당시 나의 영어 이름이었던 Amy의 줄임말) 로 불렀다. 서로의 집에 가서 놀기도 했다. 그녀가 우리집에 왔을 때 우리는 집 앞 공원의 잔디 언덕에서 구르며 내려오기 놀이를 하고, 집에 와서 어린이용 화장 세트로 서로의 얼굴에 화장을 해주었다. 우리는 서로 초록색과 파란색 아이셰도를 칠해주고, 검은색 아이라이너로 진한 라인을 그렸는데, 이내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들을 서로에게만 공유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다. 그 남자애는 짧게 자른 금발에 푸른색의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스포츠와 풋볼을 좋아해서 본인이 응원하는 풋볼팀의 져지를 자주 입었는데, 그런 남자다운 모습과는 대조되게 가까이 갔을 때 항상 포도 사탕과 비슷한 달콤한 향기가 났다. 나는 Hedi에게만 그 남자애에 대한 나의 마음을 공유하며 그와 어떻게 하면 가까워질지 전략을 짰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일단 그의 락커에 몰래 그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는 짧은 편지를 넣는 것이었다. 


나는 쉬는 시간에 몰래 그의 락커에 쪽지를 넣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그 남자애가 락커를 열었을 때 긴장되는 마음으로 그 근처를 서성이며 그의 리액션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가 락커에서 편지를 발견하곤 당시 본인이 친했던 어떤 여자애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가 장난을 친것으로 오해를 해버린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남자애가 제일 친했던 여자애의 이름이 나와 같았는데, 그녀는 나와 같이 “Amy”로 표기하는 것이 아닌 “Aimee”로 이름을 표기했다. 그 남자애가 내가 아닌 다른 “에이미”를 찾으며 두리번 거리는 것으로 그렇게 Hedi와 나의 계획은 아쉽게 실패로 끝났다. Hedi는 슬퍼하는 나에게 그 남자애가 보는 눈이 정말 없다고 얘기하며 위로를 해주었다. 


Hedi와 나는 일상속에서 키득거리며 작은 농담들을 나눴고,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때까지 한참을 웃었다. 나는 Hedi와의 우정을 통해 작은 실연의 아픔을 금방 극복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시점이 되었을 때, 나는 Hedi와 나눈 우정이 영영 끝나 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미국에서 마지막 며칠을,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며칠을 총 일주일동안 밤마다 울었다. 




실제로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몇년이 지나자 우리의 대화 소재는 금새 고갈되었다. 나는 SNS의 진화에 함께 Myspace - Facebook - Instagram 으로 틈틈히 Hedi의 소식을 볼 수 있었다. Hedi는 중학교 때 이후로 Punk족의 영향을 받은 패션을 추구했으며, 대학에서는 생물학을 전공했고, 언젠가부터 BTS의 팬이 되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어 뉴욕으로 인턴십을 가게 되었을 때, 나는 Hedi에게 가장 먼저 연락했다. 십년 넘게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Hedi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Hedi는 우리의 만남이 어색할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막상 다른 내용의 메시지를 하다가도 만나자는 말에는 답이 없었다. 


Hedi는 첫사랑과 같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아득한 첫친구가 되었다. 실제로 나는 Punk 패션을 즐겨입고 BTS 지민을 좋아하는 현재의 Heather은 만난 적이 없다. 그저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의 Hedi 알 뿐이다. 모든 관계에는 기한이 있다. 나와 Hedi의 우정의 기한은 내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던 시기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이후에도 기억할만한, 따뜻한 우정을 나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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