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다시 로펌으로 돌아가면 안돼?
나는 고등학교 때 미국 대학을 잠시 준비했다. 미국 대학을 준비하기 시작한지 6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부모님께 현재 준비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얘기했더니 대뜸 미국 대학을 보내줄 돈이 없으니 포기하라는 말을 했다. 처음에 내가 미국 대학을 준비하겠다고 했을 때는 별 말씀이 없으셨는데, 이미 준비한 지 반년이나 지난 시점에 이런 말을 하자 당황스러운 감정과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빠에 대한 원망감이 들었다. 아빠는 대체 왜 잘나가던 대형 로펌을 나온 것일까? 계속 다녔으면 우리 가족이 돈이 없어 유학을 보내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아빠는 암기력이 좋아 시험을 잘 치는 386세대형 인재다. 아빠는 원래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잠시 하다가 내가 태어나고 나서는 직장을 그만두고 사법고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타고난 암기력 덕분에 2년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업계 3위 안에 드는 대형로펌에 취직할 수 있었다.
아빠가 로펌에 다니던 시절을 생생히 기억한다. 회사에서 모든 변호사의 가족을 초청해 뮤지컬을 보여주고 화려한 뷔페를 대접했다. 당시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 회사에서 그날 온 모든 아이들에게 10만원씩 용돈을 쥐어줬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때 아빠의 회사에서는 아빠가 법학 석사 과정을 밟을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다. 아빠와 함께 엄마, 남동생, 그리고 나도 미국에 함께 갔다. 당시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는 수영장과 커다란 공원이 있었다. 공원에는 우리가 올라탈 수 있을만큼 거대하고 튼튼한 나무가 있었고, 우리는 나무에 올라가 탐정 놀이를 했다. 그리고 잔디로 된 공원 언덕에서 데굴데굴 내려오며 구르는 놀이를 했다. 겨울에는 눈이 가득 쌓인 공원에 온 가족이 썰매를 가지고 나가 질릴 때까지 썰매를 탔다.
우리 가족은 미국의 자유롭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몇 년 뒤 중학교를 진학하게 되었다. 동일한 시기에 젊은 시절의 아빠는 커리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기 위해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러나 대형 로펌의 금융 부문에서 일을 하게 되며 대부분의 시간을 기업들의 금융 계약서를 검토하는데 쓰고 있었고, 본인이 생각했던 일을 정말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질문하게 되었다. 대형 로펌을 나와 새로 개업을 한다면 사회적 약자들에게 무료 법률 상담도 제공하고, 공익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평일에 밤 11시-12시에 퇴근하며 가족들 얼굴을 거의 못보지만, 개업을 한다면 자율성이 더 생길테니 평일에 가족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일정 관리를 할 생각이었다.
당시 아빠는 몇년 더 일하면 로펌의 지분이 생기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던 만큼 과연 지금이 로펌을 나가는 타이밍이 맞는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이런 고민을 해왔었고, 지금 나가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회사를 떠나는게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아빠는 로펌을 나가기로 과감한 결정을 했고, 가족들에게 이를 알렸다.
당시의 나는 아빠의 결정이 탐탁치 않았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빠의 회사가 아이들에게 10만원씩 용돈을 주고, 미국 유학도 보내줄 정도로 대단한 회사라는 점은 분명했다. 그러나 아빠는 나의 반대 의견 때문에 쉽게 생각을 바꿀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아빠는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던 시점에 회사를 나오기로 결심했고 작은 법률 사무소를 개업했다.
아빠는 법률 사무소를 개업하고 본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본인의 사업 수완이 생각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성실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다소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소규모 법률 사무소의 실적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고객을 끌어오는 영업력인데, 아빠는 성격상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낯을 가렸고, 본인을 어필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아빠의 수입은 로펌에 다닐 때와 비교했을 때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엄마와 맞벌이를 하고 있어 집안이 크게 기운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이전과 비교했을 때는 형편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학생들의 개성을 무시하고 규율로 통제하며, 암기 중심의 교육을 진행하는 한국 고등학교를 답답해했다. 미국에서의 행복하고 자유로웠던 순간들이 계속 떠올랐고, 미국 대학 진학이 매우 간절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으로 인해 어려워지게 되면서, 아빠에 대한 원망감이 점점 커져갔다. 당시 다양한 대외활동을 했는데, 그때 만났던 특목고에 다니던 친구들 중 부유한 친구들이 많았다. 어떤 친구가 무심코 걸치고 나온 프라다 가방과 다른 친구가 친척에게 선물 받았다는 비비엔 웨스트우드 가방을 보면서 마음 속에 작은 박탈감이 느껴졌다. 가장 싫었던 순간은 사는 곳을 물어볼 때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강남 또는 목동 지역의 어디어디를 말하고는 했는데, 내가 사는 곳을 말하면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처음 들어보는 곳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는 나는 내가 실제로 사는 곳을 말하기 보다는 근처에 사람들이 알만한 지명을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한가지 또 숨기게 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아빠의 직업이었다. 한번은 어떤 친구가 대뜸 아빠가 뭐하는지 물어봐서 변호사라고 했더니 “너네 집 엄청나게 부자겠네!”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게 싫어서 아빠의 직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
아빠가 미웠다. 아빠가 로펌을 나오고 나서는 무료로 진행하는 공익적 활동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활동이 마치 나의 행복을 희생시켜 하는 활동처럼 느껴졌다. 당시 엄마와 아빠는 다양한 재단에 기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의 형편이 넉넉치 않은데 왜 이렇게 기부를 많이 하는 걸까?
아빠가 로펌을 나온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은 내가 대학을 진학한 다음에도 계속되었다. 당시 아빠가 나온 로펌 동료의 아들이 하버드에 진학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내가 미국 대학을 갔다면 어땠을까 자꾸만 상상했다. 내 손가락 끝까지 왔던 기회들이 아빠가 로펌을 나옴으로써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한 생각을 수백번쯤 했을 즈음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근무 강도가 쎈, 다소 경직된 문화의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평일에 새벽까지 일하고는 집에 돌아오는 택시에서 곯아 떨어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위계적이고 경직된 회사 문화 속에서 정신이 피폐해지고 생기를 잃어갔다. 몇년간 지독한 성장통을 겪었다. 가장 힘든 것은 인간관계였다. 직장 동료, 상사, 그 외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는데서 인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난제들을 겪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단순히 일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적절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이어나가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맞는 방법인지 모를 때가 대부분이어서 골머리를 앓곤 했다.
내가 대학 때부터 인생에서 고민이 많을 때 주로 상담했던 대상은 엄마였다. 엄마는 항상 놀라운 지혜와 통찰력으로 나를 현명하게 가이드해주는 인생의 코치였다. 그런데 내가 회사에 들어간 뒤로는 엄마가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엄마는 학교 선생님이었고, 학교와 회사라는 조직의 특성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엄마는 우리 집에서 프랑스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말을 직설적이고 시원하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루는 내가 상사의 어떤 성향 때문에 힘들어해서 엄마한테 어떻게 할지를 물었는데, 엄마는 이렇게 조언했다.
“그 상사한테 직접적으로 말해. 너가 그런 점 때문에 힘들다고.” 학교라는 조직에서 교사들은 모두 평등하고, 수평적인 분위기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했다. 그때 옆에서 같이 저녁을 먹으며 듣고 있던 아빠가 조언을 해줬다.
“그 상사에게 이러이러한 점 때문에 많이 배우고 있다고 먼저 말하고, 다만 이런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으니 같이 조율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해.” 아빠는 로펌이라는 조직에 다녔기 때문에 내가 겪는 고민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날을 계기로 나는 회사 관련 고민들은 아빠에게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나의 일상에서 유일하게 항상 나를 기다려주는 기둥같은 존재들이 되어 주었다.
평일에는 야근으로 인해 엄마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할 때가 많지만, 내가 늦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김없이 카톡이나 전화가 온다.
“언제 와?”
“늦을 듯”
"고생이네 ㅠㅠ”
가끔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마주앉아 저녁을 먹고 있던 엄마아빠가 나를 반긴다.
“오, 온초 오늘 일찍 왔네” 그리고 어김없이 허그를 해준다. 아빠와는 약간 부끄럽기 때문에 살짝 거리를 두고 어깨 정도만 터치하는 에어허그를 한다.
우리 가족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은 주말이 되었다. 주말 아침에 엄마와 아빠는 함께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하고, 근처에 있는 프랑스 컨셉의 동네 빵집에서 빵을 사온다. 나와 동생이 엄마아빠가 대화하는 소리에 점심때쯤 느즈막하게 일어나면, 온 가족이 엄마아빠가 사온 빵을 먹으며 수다를 떤다.
나는 집 밖에서는 여전히 고군분투중인 n년차 직장인이지만, 엄마아빠가 만들어놓은 따뜻한 집의 울타리에 다시 들어올때면 보호받고, 무조건적으로 이해받는다. 집을 나서 회사에 갈 때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님이 된 것 같은 비장한 마음으로 집을 나서지만, 집에 돌아올 때는 안도의 숨을 쉰다. 엄마아빠는 내가 회사 생활 때문에 힘들 때마다 항상 말했다.
“온초야, 너가 행복한게 가장 중요해.”
인생에서 나의 행복을 무조건적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이다.
여전히 나는 집이 부유한 친구들을 보며 가끔 부러워한다. 가끔 아빠에게 장난으로 아빠가 계속 로펌 다녔으면 우리 집은 부유한데 화목하기까지 했을거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마음 한켠으론 생각한다. 엄마아빠가 매일 같이 같은 식탁에서 나누는 다정한 저녁 식사와, 우리 가족이 마주 앉아 눈을 비비며 먹는 프랑스 빵은, 그리고 일찍 퇴근한 저녁에 아빠와 어색하게 나누는 에어 허그는 어쩌면 아빠가 로펌 파트너가 되어 우리 가족이 누렸을 경제적 풍요로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