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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모어 살롱 Nov 15. 2020

안녕, 밍기뉴

외로운 마음을 안아준 위로의 책, 그리고 한 마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내 가장 친한 친구는 책이었다. 부모님도, 동생도, 친구들도 알려줄 수 없는 넓은 세상을 내게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 준 책은 어린 내게 세상을 탐험하는 망원경이었고, 둘도 없는 동지였다. 물론 세상은 책 속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를 때도 많았지만, 겁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충격 완화장치였고 나와 내가 속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히겠다는 꿈을 꾸게 한 계기였다.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 작은 세계는 책을 통해 전 세계가, 때로는 심해와 우주로까지 넓어졌다. 그 안에서 어떤 한계와 억압도 없이 자유롭게 헤엄치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부모님은 어린이인 나와 잘 놀아주고 잘 들어주셨지만 아이와 어른의 마음 세계는 너무 달랐고, 학교나 학원에서 만난 언니 오빠들과 친구들은 같이 신나게 놀다가도 저녁이 되면 각자의 집으로 흩어져야 해서 언제나 아쉬웠다. 동생은 그 당시 나보다도 작았고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실험을 즐기는 꼬마여서 말이 통하지 않았다(어린이들에게 동생이란..)

어린이도 외로울 때가 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저녁이 되어도 헤어지지 않고 하루 종일 함께 놀 수 있는 친구와 모험을 떠나고 싶다. 그리고 내게도 그 시절부터 함께 해온 책들이 있다. 그 책들 덕분에 외롭고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잘 보내지 않았나 싶다. 


특히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이 책을 읽었던 그 날의 뜨거운 날씨처럼 내 마음을 쿵하고 움직이게 하고, 뜨겁게 안아주었다. 여러 책 속에서 희로애락과 모험과 도전을 하며 꿈을 이루며 상기된 어린 내 얼굴이 아직 눈에 선하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그 어린 얼굴에 처음으로 사랑하는 존재들과의 가슴 벅찬 만남과 함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헤어짐을 알려주었던 책이었다. 책 속의 제제와 밍기뉴는 어린 나에게 처음으로 세상에는 이해되지 않는 일도, 원하지 않는 이별도 있다는 것도,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 것도 알려주었다.


아직까지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먼 나라의 작은 아이와 그 아이의 친구인 작은 라임 오렌지 나무를 만나면서 내 세상은 삶의 희로애락으로 생동감이 넘치게 되었고, 작고 약해서 소외당하는 존재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인데,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쓰며 내 마음속 밍기뉴와 끊임없이 대화한다. "어때? 너도 그렇게 생각해?"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동심을 가진 ‘나의 밍기뉴’가 있었기에 더 많은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순수했던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아 힘들 때면 책 속 세상으로 빠져 들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이렇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건대 3n 년의 내 삶을 통틀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통해 가장 큰 위로를 받았고, 내 마음은 아직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었던 그때에 멈춰 있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아홉 살 그때 책 속의 세계에서 사귄 또래 친구인 제제와 그의 베프 밍기뉴와 나도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어린이만이 통하는 정서에 마음속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어 제제와 밍기뉴의 슬픔에 엉엉 울면서 함께 짧은 인생에서 만난 사랑하는 존재들을 잃어 무너진 세계를 공유했다. 비록 제제와 밍기뉴는 어린 나이에 상실감, 이별을 겪으며 그 작은 세계의 무너짐을 경험하며 이야기는 끝났지만 제제와 밍기뉴뿐만 아니라 나의 세계도 그렇게 성장하게 되었다. 


작은 장난꾸러기 제제와 라임 오렌지 나무 밍기뉴의 우정이 너무나 부럽기도 하고 서로를 위로해주고 지켜주는 모습에 위안이 됐다. 제제의 “가슴속에 행복의 태양”이 빛나게 해 준 뽀르뚜가와의 시간이 찰나와 같이 짧게 지나갔지만, 그와 함께 한 시간은 제제의 마음속에서 나침반이 되어줄 거라 아직도 믿고 있다. 뽀르뚜가처럼 제제에게 비뚤어지지 않고 자랄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사랑을 표현해준 사람은 없었다. 제제 또한 뽀르뚜가에게 편견도 조건도 없는 순수한 사랑을 표현하며 서로의 마음을 천천히 치유해주었다. 그리고 제제를 지탱해주고 행복하게 해 준 밍기뉴, 뽀르뚜가와의 시간은 내게도 큰 위로와 안정감을 주었다. 주 6일제가 시행되던 때 일요일에만 아빠와 맘껏 놀 수 있었고, 엄마는 함께 사는 이모, 삼촌들의 빨래와 식사까지 챙기느라 너무 바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아껴주는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해 주었던 것이다. 


사실 제제의 삶은 그 어린아이에게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사납고 가혹하다. 말썽을 부리는 모습에 모두가 제제를 흠씬 두들겨 패며 혼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밍기뉴와 이야기를 나누는 제제는 당돌하지만 눈치도 빠르고 속이 깊기도 하며 마음이 여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외로운 아이이다.  제제의 마음속을 들여다 봐준 이는 밍기뉴와 뽀르뚜가, 둘이었고 온 마음을 다한 진정한 우정을 나누었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내 마음은 미숙하고 이기적이기가 아홉 살 때와 똑같고, 타인을 품어주고 배려하는 마음은 자랐어야 하는데 아직 다 자라지 못한 것 같았다. 뽀르뚜가와 밍기뉴가 제제의 상처와 분노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고, 끊임없이 제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랑을 표현해주었던 것을 배워 그대로 베푼 적이 있을까? 다시 한번 책을 읽으며 이제는 제제를 혼내고 몰아붙이는 어른이 아닌 뽀르뚜가와 같은 어른이 되어야겠다 다짐한다.


이렇게 가장 제제를 사랑하고 잘 이해해준 소울메이트와 같았던 두 존재와 거의 동시에 이별을 하게 된 제제가 그 이후에 어떻게 자라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때때로 궁금하고 걱정스러웠다. 밍기뉴, 뽀르뚜가와의 이별을 겪고,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건너온 제제에게 현실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로웠을까 생각해본다. 말썽을 부린다고 하지만 제제에겐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당하고 매를 맞는 매정하고 차가우며 서릿발 같은 세상이지 않았을까. 책을 다시 읽으며 그때처럼 엉엉 울음이 났다. 제제, 너는 이제 어른이 되어 밍기뉴와 뽀르뚜가를 잊었니? 아니면 그들을 마음에 품은 채로 밍기뉴와 뽀르뚜가가 필요한 어린이와 마음을 다해 우정을 나누고 있니? 내 마음속 제제를 끌어안아 위로해준 이 책으로 인해 나도 제제를 이해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채로 자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도 밍기뉴가 자라 어리고 외로웠던 마음에 친구가 되어주었다. 고마워, 제제 그리고 밍기뉴.



“아저씨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니까. 아저씨하고 같이 있으면 아무도 나를 함부로 못 해. 그리고 난 ‘가슴속에 행복의 태양’이 빛나는 걸 느껴”

제제가 뽀르뚜가에게 이야기 한 이 말이 내게는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면서도 눈물이 흐르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다. 그동안 제제에게는 ‘가슴속에 행복의 태양’이 이렇게 찬란히 빛났던 시간이 찰나와 같은 몇 번뿐이었을 테니까. 





2020년, 전 세계적으로 혼란스럽고 우울한 시기에 내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책을 다시 한번 또 읽어보며 글을 쓴다. 몇 번을 읽어도 여전히 내 마음을 위로해주고 토닥여주는 제제와 밍기뉴가 고맙고, 이제는 내가 내 마음속 친구인 제제, 밍기뉴에게 그들이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최고의 친구가 되어야겠다. 내가 얼마나 있는 그대로 소중하고 사랑받고 있었는지 잊고 있던 마음속에 다시 행복의 태양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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