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어서 감사해
“한쪽 폐와 대동맥에 굳어진 진물을 다 뜯어낼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갈비뼈도 2대는 잘라내야 합니다. 이 정도 규모의 수술이면 수술실에서 살아 나오면 기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마흔 정도만 됐으면 그대로 사는 게 낫다고 했을 텐데… 스무 살이니까 시도해보는 거죠.”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한 달 동안 입원해있던 병원 침대에 앉아 주치의 선생님께 들었던 말이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탈이 많은 아이였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처럼 인생의 어느 한 고비도 무난하게 넘어본 적이 없다. 나를 임신했을 때 엄마는 임신중독증으로 몸이 심하게 부어 아빠의 신발도 신을 수가 없었고, 누웠다 일어나면 심한 하혈과 빈혈로 앞이 깜깜해져 벽을 손으로 짚고 집안일을 하셨다고 한다. 혈압은 정상 수치인 120에서 순식간에 200까지 치솟고 폐에 물이 차서 결국 나는 마지막 달을 못 채우고 9달 만에 제왕절개 수술로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반나절 예정된 수술이 하루를 꽉 채웠고, 나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인큐베이터에서 한 달을 마저 채우고 나왔어도 나는 수건을 반 접어 그 위에 눕혀놓으면 반 이상 공간이 남는 아주 작은 미숙아였다.
시작을 작고 약하게 시작해서인지 그 이후로 크고 작은 병치레를 겪고, 잔디썰매를 타다 나보다 큰 아이와 부딪혀 굴러 떨어진다던가, 피구 하다 새끼손가락의 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러지는 등의 사고를 이겨내며 자랐다. 중학교 3학년, 그 당시 서울을 제외하고 많은 지역이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경기도에 살았던 나 또한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 시험을 쳐야 했다. 고입 시험을 한 달 앞두고 나는 인생 첫 수술을 했다. 오른쪽 난소에 어린아이 머리만 한 크기의 혹이 생겨서 오른쪽 난소를 절제하는 수술이었는데, 아직 어린 내 몸이 견디기에 규모도 후유증도 큰 수술이었다. 수술 후 고입시험에서 나는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고 원했던 학교에는 가지 못했다. 수술 후 몸을 추스르고 회복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시작한 고등학교 생활은 많이 어려웠다. 수술 후에도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검사와 치료를 병행했는데, 몸도 아프고 힘들었지만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다. 10대 소녀가 산부인과에 들어가는 순간 호기심이 가득 찬 눈빛이 쏟아지는데 그 눈빛들에 괜히 주눅 들고 창피했다. 하지만 공부를 곧잘 해서 고3이 될 무렵의 나는 조금 설레고 들뜨기도 했다. 고3 생활의 첫날이 오기 전까지는.
고3 생활은 2월에 시작했다. 정식 수업은 3월부터 시작하지만, 2월 중순에 3학년 교실에서 자율학습과 보강 수업이 진행이 된다. 친구들과 함께라면 고3도 즐겁겠다는 설렘과 성적을 올려 꿈을 이루겠다는 기대로 나는 들떠서 등교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 앞에서 깜빡이는 초록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면 지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고, 전력 질주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리고 암흑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왕복 4차선의 횡단보도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차에 치여 붕 날아올랐다 떨어졌다고 했다. 사고의 규모에 비해서 나는 정말 멀쩡했다. 의사 선생님은 기적이다, 이렇게 몸 안팎이 조금 다칠 수 있었던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사고 후유증이 심해서 한의원에 치료받으러 다니느라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고, 그 해 수능은 모의고사 때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낮은 점수였다.
수능과 대학이 삶의 전부였던 고3 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고, 재수를 결심했다. 진짜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독서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독학을 하기로 했는데, 이미 수술과 교통사고로 몸이 많이 약해져 있던 것이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환기가 되지 않는 독서실을 청소하다 보니 감기가 폐렴이 되고, 폐렴이 심해져 오른쪽 폐가 거의 사라질 정도로 물이 차고 굳어져 버린 것이다. 원인은 모른 채 숨을 쉬지 못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두 번째 수능을 치렀다. 결과는 이번에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아프고 수능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은 것보다 왜 나에게는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한 고비 넘으면 또 한 고비 나타나는지 마음이 더 괴로웠다. 수술을 앞두고 주치의 선생님은 정말 어렵고 위험한 수술이라고 하시며 도입부에 이야기한 그 이야기를 하셨다.
수술하기 전날, 태풍 때문에 창 밖으로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다. 이제 나는 죽는 걸까 생각하면 숨이 막혀왔다. ‘죽으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내가 죽으면 남아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하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흔적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일찍 죽는데 내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고민들에 잠들지 못한 채 아침이 밝아왔고 수술실로 들어가는 순간이 왔다. 수술실 앞에서 침대에 누워 들어가는 내게 부모님은 웃으며 수술이 잘 되어 건강해질 것이라 손을 잡아 주셨지만 나는 지금 보는 부모님과 동생의 얼굴이 마지막일 것 같아 너무나 두려웠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나는 수술실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붙잡혔다. 정신을 차리니 너무 추워서 몸이 떨리면서도 어딘가 따듯한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살구색의 벽뿐. 내 이름이 무엇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눈 뜨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나의 존재에 대해 한참 고민한 뒤 수술실에서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는 것일까, 죽어있는 것 일까. 살구색의 벽을 보니 죽어서 지옥에 온 것 아니구나 안심한 것도 잠시 혹시 이 곳이 죽은 자들이 심판받기 전에 기다리는 대기장소는 아닐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왜 종교가 없었을까, 종교가 있었다면 바로 천국으로 갈 수 있었을까 이런 고민들을 하며 심장이 조여들었다.
“예상보다 빨리 깨어나셨네요. 여기는 회복실인데, 이제 중환자실로 옮겨가겠습니다.” 나를 살려준 이 한 마디가 없었다면 내 심장은 쪼그라들어 사라졌을 것이다. “살았구나, 살았어!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어!”라고 아무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긴장이 풀린 나는 중환자실로 옮겨지는 도중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 날 나는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에 나온 조반니처럼 생사의 고비를 넘긴 것이다. 소설 은하철도의 밤에서는 함께 은하철도를 타고 여행했지만 중간에 내리게 된 조반니는 현실로 돌아왔고, 끝까지 은하철도를 타고 간 캄파넬라는 죽게 되었다. 아프신 어머니와 바다로 나가 소식이 끊긴 아버지, 홀로 가난과 싸우며 인쇄소에서 일하던 조반니의 현실은 너무나 힘들고 고생의 연속이었지만 은하철도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은 아름다운 풍경과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고 즐거워도 은하철도를 계속 타고 갔다면 조반니는 현실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현실로 돌아온 조반니에게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고 현실에서도 희망이 뿌옇게 밝아온다.
회복실에서 혼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삶과 죽음에 고민하던 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다. 그때 이후로 내 삶은 두 번째로 받은 삶인 것만 같다. 의사 선생님들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그때 나는 기적같이 살았고, 삶은 힘들고 지치는 순간도 많지만 막상 죽음이 닥쳤다 생각하니 끔찍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늘도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것 자체로 행복하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대신 살아 있는 오늘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는 내게 달렸다.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지는 대로 살아왔던 내게 은하철도를 미리 타본 경험이 앞으로는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흔적을 남기고, 섞여서 이왕이면 좋은 영향을 더 많이 끼치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지금까지 내게 부정적이었던 잿빛 삶이 태양이 비치는 밝은 날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살아 있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