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 여동생과 나를 표현할 때 가장 알맞은 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부딪히고 하루에 한 번은 꼭 싸우면서도 항상 붙어 다닌다. 어떻게 이렇게 맞는 부분이 없는지, 과연 우리가 친자매가 맞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우리를 연결해주는 연결 고리가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가장 좋은 짝꿍이 되었다. 함께 있으면 죽이게 즐겁다는 소설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도 부럽지 않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가 세 살의 꼬마였을 때 함께 한글을 배우던 친구들은 다 동생이 있었다. 동생을 사주지 않는 엄마에게 서운해 공부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발을 뻗고 울어댔다. 임신중독증으로 인해 힘들게 나를 낳고 둘째는 없다 선언하셨던 부모님은 지치지도 않고 울어대는 나에게 동생을 선물로 주셨다. 엄마는 아직도 그때 울면서 떼쓰길 정말 잘했다고, 내가 했던 가장 잘한 일이라고 이야기하신다.
물론 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우리가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하진 않았다. 우리 관계의 1막은 끝없이 싸우기만 했던 어린 시절이다. 동생이 없을 때는 부모님과 이모, 삼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내게 동생은 사랑을 빼앗아간 경쟁자였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보지 않을 때 볼을 꼬집어보기도 하고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동생을 괴롭혔다. 무럭무럭 자란 동생은 걷기 시작하고 말을 하면서부터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힘이 센 동생은 무작정 때리고 발로 차고, 동생보다 발달이 빠르던 나는 때리고 도망가면서 수도 없이 싸웠다.
동생과 나는 서로를 부모님과 이모들, 삼촌들의 사랑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라이벌로 생각했고, 서로 너무나도 반대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반감이 계속해서 커지기만 했다. 한 번은 동생이 말을 점점 더 잘하게 되어 속담과 관용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내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언니는 나를 벌레 보듯이 싫어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동생이 얄밉고 싫긴 해도 피가 섞인 가족이고 내 동생이니 사랑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동생은 어려서 내가 미워하는 만큼 좋아하기도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동생에게도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우리가 잘 맞지 않고, 네가 어려서 내가 귀찮아했던 것이라고 사과를 했다. 그 이후에는 언제나 동생이 많이 상처 받지는 않을까 살피게 되었고, 동생과 싸우면서도 “나는 너 벌레 보듯이 싫어하지 않아”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우리 관계에는 변화가 생겼는데, 서로 말이 안 통하니 아예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여러 번 수술하고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이때 우리 각자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몸이 아프니 마음도 부정적이고 위축되기 시작했고, 동생은 내가 병원에서 입원해 있는 동안 혼자 집에서 등하교하면서 두려움을 이겨내는 연습을 했다. 그 시간이 다른 성향을 가진 우리가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달라지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나는 내향적이고 익숙한 것을 좋아하며,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집순이가 되었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매우 서툴어 사람이 많은 곳과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이 어렵고, 몇 명의 친구와 깊이 교제하는 편이다. 반면에 동생은 외향적이고 새로운 것과 새로운 사람들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집에서 정적인 상태로 있는 것을 힘들어한다. 각자 큰 일을 겪으면서 힘들었고, 나름의 방법으로 이겨내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동생이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친해졌다. 함께 쇼핑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영화를 보고, 연애 상담을 하면서 친구를 사귀듯이 서로에 대해 하나씩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정말 많았다. 나를 깨물고 때리던 어린아이가 언제 이렇게 속이 깊고 활발하면서 당찬 어른이 되었을까 놀라기도 했고, 내가 아프다고 나만 보던 시간 동안 동생은 힘든 가족들을 돕고 응원하며 멋진 어른으로 자라게 된 것에 애틋해졌다. 동생도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자신보다 폐쇄적이고 내향적이지만 의지가 단단해진 내 모습을 보며 의지도 하고, 사람들과의 소통을 도와주기도 한다. 우리를 연결해주는 고리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미국으로 일 년 반 동안 인턴십을 위해 떠나자 서로에 대한 애틋함이 더욱 커졌다. 동생과 나는 매일 메신저와 영상 통화를 하면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동생은 내가 미국에서 정말 아프지 않고 잘 있는지 살피기 위해 장학금을 받아 혼자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와 주었다. 이때 나는 크게 감동했는데, 동생은 혼자서는 여행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같이 다니면 식당에서도 주문은 내게 떠넘기기 일쑤인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애틋함도 잠시 우리는 만나자마자 다시 싸우기 시작했지만 부모님 없이 오롯이 둘이서만 보냈던 두 달은 서로를 더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언니가 아프지 않게 맛있는 음식을 잔뜩 해준다던 말과는 달리 매일 요리는 내가 하게 되었고, 좋은 곳을 다 구경시켜 주겠다던 내 말과 다르게 우리는 집 주변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즐거웠다.
자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 친해지지 못하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해 멀어졌을 것이라 이야기하곤 한다. 아직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소통하면서 갈등이 생기면 두렵고 막막하지만 동생과의 관계를 통해 나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다른 부분이 많으면 어때, 부딪힐 때가 많으면 어때, 이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데!’ 서로의 다름을 통해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내 세계도 더 깊고 커질 수 있다는 것을 매일 동생과 싸우면서 몸소 느끼고 있다. 체형도, 입맛도, 패션 스타일도, 성격도 다른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퍼즐 조각처럼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다. 나는 매일 아침 무슨 옷을 입을지 동생에게 꼭 물어본다. 동생은 자기소개서를 쓸 때 항상 나를 찾는다. 아마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우리는 지금처럼 매일 싸우면서 서로를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