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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 가든(Kew Gardens)

100년전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울프가 걸었을 그 길

by 커튼콜 스완


버지니아 울프와 남편 레너드 울프가 호가스 프레스를 세운 리치몬드, 그 옆동네 큐가든.

영국에서 집과 회사 말고는 가장 자주 찾았던 곳, 가장 깊이 사랑했던 그 길들.

오랜만에 사진첩을 뒤적이니 다행히 큐가든의 기억들이 남아있다.


언젠가 다시 그 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퀼트가게 원단들을 찬찬히 구경하고,

큐가든 입구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스콘찻집에서

오래된 본차이나 찻잔에 담긴 따뜻한 차와

쫀득쫀득한 갓 구운 스콘을 맛보고,

리치몬드 힐에 올라 템즈강 풍경을 내려다보며, 큐가든 정원의 공작새들과 재회할 그날을 생각한다.


이제는 나에게 100년 전 레너드 울프가 앉아 세 유대인 이야기를 구상하던 바로

그 큐가든이 내 시야에 펼쳐질 것이다.

큐가든 어느 조용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나비와 달팽이를 바라보며 색채와 빛과 발걸음으로 한 편의 영화처럼 글을 그려낸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 속으로 나 또한 스며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저 문을 열면 100년전 호가스 프레스에서 손으로 작은 책자를 찍어내던 울프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안녕 공작새야! 너는 어쩌면 이리도 오묘한 청록의 깃발색을 가졌을까.

사랑했던 큐 가든의 보태니컬 작품들

레너드 울프의 세 명의 유대인에서 잔디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표지판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걸 떠올리게 하는 사진 발견. 이제 큐가든의 표지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군.

코코아 열매. 내 강화 정원 온실에서 언젠가 키울 수 있길


여름이 지나가는 길목이다.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나는 올해 정말 더웠던 그 몇 주 동안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며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새 계절은 돌아가고 달력도 넘어간다.

이제 가장 사랑하는 겨울이 또 곧 찾아올 것이다.


회사는 가장 바쁜 시즌에 접어들었고,

올해는 부산국제영화제에도 다녀왔다.


계절은 이렇게 또 지나가고, 다시 어디론가 순례의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과

그저 커튼을 닫고 며칠이고 잠만 자고 싶은 마음이 교차한다.


환기미술관에서 향안과 환기를 떠올리며 멍하니 그림만 하루 종일 바라보고 싶기도 하고,

남산 국립극장 라운지에서 창밖 풍경을 내다보며 맥베스 공연 시간을 기다리고 싶기도 한 날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스콘집이라고 생각하는 큐가든의

The Original Maids of Honour 의 스콘이 먹고 싶은 날이다.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기도, 아니면 새로운 추억을 더하고 싶기도 한 그런 센티멘탈해지는 2025년 9월이다.


큐가든에서 찍은 어린 조카들의 사진을 보며 클림트의 'Liebe'를 떠올린다.

인생은 그렇게 또 다른 막으로 옮겨간다.

The Orginal Maids of Honour : 스콘과 티가 맛있는 큐가든 건너의 오래된 찻집


#큐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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