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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박쥐와 불가사리

왕의 정원에 새겨진 영원과 복을 새긴 문

by 커튼콜 스완

회사에서 지척인 경복궁에 가끔 간다.


궁엔 늘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결국 내 카메라는 사람 대신 하늘을 본다. 그 하늘 끝, 지붕의 추녀마다 조용히 궁을 지키는 수호신들이 서 있다.

근정전에는 그 잡상이 열한 개. 경복궁에서 가장 많은 수호신이 모여 있는 곳이다.


눈을 들어야만 만날 수 있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잇는 존재들.

왕을 지키던 수호신, 지금은 궁의 하늘을 지키는 작은 파수꾼들이다.

나는 늘 이런 상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들의 표정엔 시대의 신앙과 상상, 그리고 인간의 두려움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도시를 걸을 때마다 하늘과 지붕, 그 끝의 얼굴들을 먼저 찾는다.

자경전 자체는 보물도, 국보도 아니다. 하지만 그 뒤편의 굴뚝은 다르다.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 — 국보 제810호이다.

십장생은 해, 달, 산, 물, 대나무, 소나무, 거북, 학, 사슴 불로초 또는 해, 돌, 산, 물, 구름, 소나무, 대나무, 불로초, 거북, 학이라고도 한다.

생명과 영원을 상징하는 이 열 가지가 자경전의 굴뚝에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잡상이 궁의 하늘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면, 십장생은 시간과 생을 지키는 상징이다.

왕의 어머니를 위한 공간에 새겨진 그 무늬들은 권력보다 긴, 인간의 바람을 닮아 있다.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


그런데 자경전의 십장생도에는 뜻밖의 존재가 있다. 이곳에 박쥐가 있다는 걸 아는가?


처음엔 조금 의아했다. 죽음과 어둠의 상징 같기도 한 그 박쥐가, 어찌 생명과 영원을 뜻하는 십장생 곁에 있을까.

하지만 알고 보면, 박쥐는 ‘복(福)’과 발음이 같아 예로부터 길상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밤의 하늘을 나는 그 작은 생명은 오히려 빛보다 오래, 사람 곁을 맴돌며 복을 전하는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자경전의 십장생도를 볼 때마다 항상 옆면의 박쥐들을 찾는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복을 품고 날아다닌다.

그리고 박쥐 말고도 코끼리와 불가사리의 형상이 있다. 그들은 악귀를 막고 복을 불러들이는 존재들. 하늘과 땅, 장생과 복, 그 모든 상징이 한 굴뚝 안에서 숨 쉬고 있다.

굴뚝의 가장 위에는 봉황이 있다. 불사조처럼 불길 위로 날아오르는 새.

봉황은 학보다 화려하고, 왕실의 상징에 더 가까운 존재다. 왕의 덕을 비추고, 세상의 조화를 노래하는 새.

불가사리라는 전설의 동물도 있다. 쇠를 먹는 괴물, 죽일 수 없는 존재.

아무리 불을 질러도 죽지 않고, 불길마저 삼켜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괴물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지켜줄 존재로 믿었다.

그렇게 불가사리는 경복궁의 굴뚝에 남았다. 불을 일으키지 않기 위한 부적처럼, 악귀를 막는 수호처럼, 죽일 수 없다는 말은, 어쩌면 사라지지 않는 믿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굴뚝 아래엔 코끼리도 있다. 멀리 남쪽에서 온 동물이지만, 조선의 장인들은 그 낯선 형상에 지혜와 힘, 그리고 수호의 뜻을 담았다. 그리고 코끼리는 하늘의 기운을 지닌 영험한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불가사리가 불을 삼킨다면, 코끼리는 묵묵히 땅을 받친다. 하늘의 봉황과 마주 보며, 궁의 평안을 지키는 또 하나의 파수꾼이다.


경복궁은 언제 가도 조용하지 않다. 수많은 발자국이 흙길 위를 오가고, 가을 햇살은 전각의 처마 끝에 걸려 천천히 기울어간다. 사람은 늘 많지만, 그 안의 시간은 어쩐지 느리다.

궁의 하늘엔 수호신이 있고, 자경전의 벽엔 복을 전하는 박쥐가 있고, 굴뚝 아래엔 코끼리가 있다.

그 모든 상징이 오래된 벽돌 사이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런데 나는 때로, 그런 형상들이 사람보다 더 사람 같다고 느낀다.

두려움을 막기 위해, 무언가를 새기고 지키려는 마음.

그건 신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모양이다.


그래서 경복궁을 걸을 때면 나는 늘 하늘과 벽, 그리고 땅을 함께 본다. 그 위에 새겨진 수호신과 잡상, 십장생과 박쥐, 덩굴과 불가사리. 그 모두가 한결같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걸어오는거 같다.


나는 그런 마음들을 오래 바라본다.

하늘의 수호신과 벽의 십장생 사이에서 결국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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