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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해터 : 미쳐버린 건 누구인가?

뮤지컬 <매드해터: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

by 커튼콜 스완

"감히 누가 휘트커 의전 서열표를 거스를 수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이다.


울프의 단편 〈벽 위의 얼룩〉을 번역하며 내가 직접 옮겼던 이 문장은 빅토리아 시대의 공기를 가장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휘트커 의전 서열표'는 당시 영국 사회의 모든 질서와 권위를 기록한 연감이었다. 왕실과 귀족, 성직자, 군인,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계층이 줄을 서 있었고, 인간의 가치조차 그 서열표의 자리에 따라 정해지는 듯했다. 19세기 영국에서 그 질서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것은 곧 미친 일이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매드해터는 그 질서가 낳은 인간의 초상이다.

그의 모자에는 "10/6", 10실링 6펜스의 값표가 붙어 있다. 그 숫자는 단순한 가격이 아니라, 품격의 화폐 단위이자 계급의 표식이다.

그는 모자를 만드는 장인이지만, 그 모자들이 상징하는 상류의 세계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의 머리 위의 모자는 사회의 위계이며, 그의 머릿속의 혼란은 그 위계가 남긴 상처다.

매드해터의 뿌리는 19세기 영국의 모자공들에게 있다.19세기 후반의 런던은 문명과 병이 공존하던 도시였다. 그들은 모피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염화수은을 다루었고, 그 증기를 하루 종일 들이마셨다. 모자를 만들어내는 손은 떨리고, 언어는 흐려지고, 환각과 망상이 뒤따랐다.

그 병은 "매드해터 증후군"이라 불렸고, 그 광기는 산업사회의 부작용이자 문명의 대가였다.

증기 기관의 연기가 강철과 벽돌 사이로 스며들고, 런던의 거리는 석탄 먼지로 회색빛 안개에 덮여 있었다. 산업혁명의 진보는 눈부셨지만, 그 진보의 뒷면에는 수많은 장인과 노동자의 폐와 손, 그리고 정신이 서서히 부식되어 갔다. 모자공들은 이런 도시의 가장 깊은 골목에서 일했다.


그들이 만든 모자는 왕과 신사의 머리 위에서 반짝였지만, 그 반짝임은 언제나 누군가의 병든 숨결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 시절 런던의 품격은 그런 아이러니 위에 세워진 질서였다.

캐럴은 그 질서의 균열을 보았고, 그 틈에서 매드해터라는 인물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그의 광기는 현실보다 덜한 허구가 아니라, 현실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진실이었다. 캐럴의 매드해터는 그런 현실을 은유처럼 품고 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에서 매드해터는 처음부터 '논리의 질서가 무너진 세계의 화자'로 등장한다. 그가 앨리스와 나누는 대화는 문법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의미는 계속해서 어긋나 있다. 그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문장을 되묻고, 단어를 해체한다.
"왜 까마귀는 책상과 닮았을까?" 해터가 앨리스에게 묻는 이 유명한 수수께끼는 답이 없다.

The Mad Hatter 존 테니얼, <매드해터의 피타티>(1865) 퍼블릭 도메인

앨리스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하지만, 해터는 질문 그 자체로 사고의 틀을 흔들어버린다. 그는 정답을 찾는 사회의 질서를 거부하며, 의미 없음 속에서 새로운 언어의 질서를 만든다.

그의 말은 미친 것이 아니라, 이성의 구조를 비트는 유희, 즉 빅토리아 시대의 합리주의에 대한 풍자다.
해터는 모자를 팔지만 그 모자 속 세계에 속하지 못하고, 품위를 위해 일했으나 그 품위의 질서에서 추방된 존재다. 그의 웃음은 미친 개인의 웃음이 아니라, 품격을 위해 노동한 자가 품격에서 배제된 사회의 웃음이다.


지난 10월 개막한 뮤지컬 〈매드해터 :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 (주최/제작 홍컴퍼니·프로듀서 홍승희·이하 매드해터)는 이 인물을 또 다른 방식으로 되살려냈다.

무대 위의 헥터 모자 공장에는 운명에 맞서는 열네 살의 소년 노아라는 해터가 등장한다. 노아는 빅토리아 시대 런던, 산업혁명의 광기에 굴복하지 않고, '질서에 저항하는 인간'으로서의 매드해터를 보여준다. 이 해석은 매드해터를 더 이상 '미친 자'로 남겨두지 않는다.

그는 이제 시대의 독에 맞서는 예술가이자,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저항자로 다시 태어난다.

뮤지컬 < 매드해터: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 재관카드 & 티켓봉투

매드 해터는 결국, 이성의 시대가 만들어낸 가장 불합리한 계층이자, 그 불합리에 맞서 스스로의 모자를 만들어낸 인간이다.

뮤지컬 〈매드해터〉의 마지막에는 "수은으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모자들"이 등장한다.

그 설정은 단순한 기술의 혁신이 아니라, 병든 문명에 대한 선언이자 해방의 은유다. 19세기 모자공들의 수은은 인간의 몸을 망가뜨리면서 '품격'이라는 이름의 질서를 유지시켰다.

노아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모자는, 그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한다.

그는 더 이상 '광기 속의 희생자'가 아니라, 아픔을 예술로 바꾸는 존재, 즉 문명에 중독되지 않은 첫 번째 매드 해터다.

이 뮤지컬은 결국 인간의 존엄을 기억하는 이야기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독 없는 공정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인간의 결단임을 이 뮤지컬은 말하고 있다.

노아의 머리 위의 모자는 여전히 계급의 무게를 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웃음은 그 무게에 굴하지 않는 존재의 선언이다. 그는 상류층이 쓰던 검은 실크해트 대신, 자신의 손으로 만든 새로운 모자를 쓴다. 그 모자는 더 이상 신분을 증명하거나, 품위를 과시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수은의 냄새가 사라진 그 모자에는 병든 질서의 기억이 아닌, 인간의 존엄과 창조의 의지가 남아 있다. 노아는 결국, 광기의 시대를 지나 스스로의 머리 위에 놓을 수 있는 세계를 만든 인간이다.

휘트커 연감이 기록하지 못한 세계 — 질서의 언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인간의 불안, 노동, 그리고 희망. 그것이 바로 매드해터의 머릿속, 그 혼란의 찻잔 속에서 끓고 있다.


"내가 몇 번을 말해. 이건 모자 장수의 이야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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