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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의 그림에서 떠오른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

붓과 문장으로 자신을 구원한 두 예술가의 초상

by 커튼콜 스완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기고하여 실린 글입니다. *


프리다 칼로의 '두 명의 프리다'를 마주하면, 우리는 한 사람의 초상 속에서 두 개의 세계를 본다. 하나는 멕시코의 전통 복장을 입은 여성, 다른 하나는 유럽식 흰 드레스를 걸친 여성이다. 두 사람 나란히 앉아 있지만, 각자의 심장은 드러나 있다. 한쪽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다른 한쪽으로 이어지고, 그 실핏줄처럼 가는 선이 두 여인을 묶는다. 그림 속 두 프리다는 서로 닮았으나 완전히 같지 않다. 그들은 분열된 자아이자, 서로에게 생명을 나누는 또 다른 나이다.


두 명의 프리다 the-two-fridas-1939.jpg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문득,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이 떠오른다. 프리다가 두 자아를 시각적으로 마주 앉혔다면, 울프는 그 두 자아를 문장 속에서 대화하게 했다. 그녀는 자서전적 에세이 <과거의 스케치>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두 개의 나이다. 하나는 삶의 표면을 살아가고, 다른 하나는 그 표면 아래에서 관찰하는 나이다." (Virginia Woolf, A Sketch of the Past, in Moments of Being, ed. Jeanne Schulkind, 2nd ed., Harcourt, 1985, p.72. 번역 : 필자)

울프가 말한 '두 개의 나'는 동시에 '두 개의 자아'였다. 하나는 현실 속에서 움직이며 관계를 맺는 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모든 장면을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는 의식이다. 그녀의 문장 속에서는 삶을 사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가 끊임없이 부딪히고 대화한다. 그 긴장과 균열이 바로 울프의 문체를 움직이는 내적 리듬이 되었다.


<댈러웨이 부인>에서 클라리사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적 역할과 내면의 목소리 사이를 오가며,

<파도>에서는 여섯 인물의 독백이 여러 자아의 조각처럼 이어진다. 그녀의 문학은 한 개인의 통일된 정체성을 해체하고, 그 틈에서 의식의 파편들을 빛처럼 포착한다. 울프는 그 불안정한 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이에 서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 바로 그 행위가 '살아 있음'의 증거라고 믿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사랑과 상처, 육체의 고통, 여성으로서의 모순을 모두 한 화면에 겹쳐 놓았다. 두 프리다는 사실 한 사람의 두 얼굴이다. 그 심장은 찢겨 있고, 피는 흐르지만, 그 연결은 끊어지지 않는다. 프리다는 분열을 통해 자신을 지켜냈다. 하나는 세상 앞에서 살아가는 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을 바라보는 나였다. 그림 속 두 여인은 서로의 고통을 나누며 동시에 서로를 살려낸다.


울프와 프리다는 시대도, 언어도 달랐지만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예술은 외부를 향한 표현이 아니라, 내면의 대화였다. 그들은 자신 안에서 두 개의 목소리를 인정했고, 그 대립과 화해의 과정을 예술로 기록했다. 결국 그들의 작품은 하나의 동일한 메시지로 수렴한다.


나는 얼마 전 공저로 참여한 미술 에세이를 쓰면서 프리다 칼로의 <두 명의 프리다>를 마주했다. 그 두 여인이 마주 앉은 장면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다.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두 세계, 서로 다른 옷을 입고도 끊어지지 않는 연결. 그 경험이 내 안에도 있음을 서서히 깨달았다.


또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번역하며 또 다른 '두 개의 나'를 만났다.

<벽 위의 얼룩>을 읽고 옮기는 동안, 문장 속에서 의식이 흘러가고 되돌아오는 리듬을 따라가며

나 역시 '살아가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를 체험했다. 프리다가 붓으로 그렸다면, 울프는 문장으로 그렸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의 세계를 번역과 글쓰기 속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자신을 쪼개어보라. 그곳에서 진짜 내가 드러난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매일 여러 개의 '나'와 함께 살아간다. 사회가 요구하는 나, 관계 속에서 적응하는 나,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는 조용한 또 다른 나. 프리다와 울프는 그 다층적인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창조의 원천으로 삼았다. 삶을 사는 나와 바라보는 나, 그 둘의 대화 속에서 예술은 태어나고, 인간은 조금씩 자신에게 다가간다.

벽 위의 얼룩.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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