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동네 사진관을 운영하는 30대 초반의 정원(한석규)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 작은 가게에서 그는 20대 초반의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는 특별한 감정이 싹튼다.
두 주인공의 직업을 살펴보자면,
정원과 다림은 모두 카메라로 순간을 포착하는 일을 한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하지만 의미는 천지 차이다.
정원이 사진관에서 담아내는 것은 사람들의 소중한 순간들이다. 기쁨과 희망이 담긴 얼굴들, 더 나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 바람들이 그의 렌즈를 통과한다.
반면, 다림의 카메라에 담기는 건 위반의 증거다. 누구도 렌즈 앞에 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쪽은 추억을 선물하고
다른 한쪽은 규칙 위반을 환기시킨다고나 할까.
영화에는 세 명의 인물이 흥미로운 삼각구도를 만들고 있는데, 정원의 과거를 스쳐 간 지원(전미선)은 잠깐 등장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과거에는 다림만큼이나 생기가 넘쳤을 그녀가, 지금은 불행한 결혼으로 활기를 잃은 모습이다.
세 사람을 비교해 보면, 정원은 몸은 병들어 있으나 정신은 맑고 평온하며, 다림은 육체, 정신 모두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지원은 건강한 몸이지만 메마른 영혼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예전에 정원이 지원을 짝사랑했던 이유도 아마 그녀가 지금의 다림처럼 순수하고 밝았기 때문일 것이리라...
이 작품의 백미는 "죽음"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림자처럼 드리우게 만드는 연출이다.
여러 복선이 교묘하게 배치되었는데, 첫 만남에서 정원이 친구 부모의 장례식을 다녀온 것이라든가, 영정 사진을 찍기 위해 단장한 할머니, 방귀 귀신 얘기를 나누다가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 아니냐"라며 던지는 정원의 질문, 생선을 죽이는 시퀀스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비스듬한 각도에서 보여주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영화만의 섬세한 접근법이다.
열 살 차이는 단순히 나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의 삶의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외동아들로 자란 정원은 경쟁 없이 자랐다.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먹는 모습만 봐도 다림은 그가 경쟁 없이 자랐음을 직감한다. 사진관을 확장하려는 야심도 없고 일에 대한 집착도 없는데 그의 몫은 언제나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란 다림은 매 순간이 전쟁이었다. 식탁에서도 빨리 움직여야 좋은 반찬을 먹을 수 있었다. 그녀의 적극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은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졌다.
정원이 입원하게 된 것을 모르고 며칠을 기다리던 다림은 결국 사진관 유리창에 돌을 던진다. 이 장면은 다림의 본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혼자 속으로 삭이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분출하는데 형제들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생존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동시에 감정을 표출한 후에는 빠르게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20대 초반의 다림이 정원에 의해 갖게 된 마음의 상처는 아마 유리창에 던진 돌만큼의 아픔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앞으로도 사랑할 기회가 많이 남아있으므로 처음 느낀 사랑의 감정의 고통은 그리 깊지 않았을 거라 생각되었다.
정원은 다림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는데 비겁해 보일 수도 있으나, 다림의 관점에서 보면 사려 깊은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 손에 꼽힐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는데 어떻게 가벼운 마음으로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정원의 결심 덕분에~ 다림에게 이 사랑의 경험은 무겁고 어두운 비극이 아닌, 청포도처럼 상큼했던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게 된다...
다림이 느낀 감정의 깊이는 어느 정도였을까?
아마도 그녀 자신도 명확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히 만난 순수하고 따뜻한 아저씨에게 끌리게 되어 그 마음이 첫사랑의 설렘으로 발전한 건 아닐까. 눈만 봐도 눈물이 날 만큼 애절한 사랑까지는 아니었을 터.
하지만 그게 얕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스무 살을 갓 넘긴 다림에게 맞는 감정의 형태일 뿐!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감정들이 쌓이고 무르익어 깊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게 아닐까.
제목 "8월의 크리스마스"는 두 사람이 만난 여름과 헤어진 겨울을 연결하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으나, 다른 관점으로는 평범한 일상이 그들에게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했다는 성장적 의미로도 볼 수 있겠다. 8월은 만남의 계절이자 크리스마스처럼 설렘과 소중함의 순간들이었으므로...
시한부 삶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덧없음과 영원성을 탐색하는 이 영화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 스며든 슬픔과 소소한 기쁨 그리고 희망을 섬세하고 은은한 여운을 드리우며 관객의 내면을 자극하는 영화다.
영화에서 우산 하나를 함께 쓰면서 수줍게 걷는 모습은 정말 명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좁은 우산 안에서 몸을 바짝 붙이고 조심스레 걸어가는, 그 순간을 보게 되면 그 우산 아래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궁금해진다.
영화에서 우산을 함께 썼던 다림은 그 후에 며칠간 정원이 운영하는 사진관에 나타나지 않는데, 아마도 처음 느껴본 묘한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워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린 장면은 정원이 창 너머 다림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 아닐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손과 눈빛에 담는데, 다른 곳을 응시하며 미소를 짓고 있는 다림을 바라보며 정원은 무언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정원이 탄 차가 멀어질 때 그는 다림의 모습을 차곡히 기억 속에 저장한다. 단순한 추억이 아닌 죽을 때 가슴에 품고 갈 사랑의 기억으로 말이다...
마지막 장면의 다림을 보면 묘한 느낌을 받는데, 정원을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도 서운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인데도 이상하게 희망이 보인다고나 할까. 마치 정원이 떠나면서 희망의 마법 가루를 뿌려놓고 간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다림의 표정에서 고통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것은 바로 이 영화가 가진 특별한 마력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빛이 되어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정원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명대사로 유명하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다림은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이 말을 관객은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게 된다...
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멜로 영화의 정점! 유영길 촬영감독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작업한 작품이기도 하다.
줄거리를 알고 있어도 볼 때마다 감동이 새로운 이 영화! 왜 아직도 많은 이들이 심은하의 복귀를 기다리는지 이 영화 한 편이 그 답을 보여준다. 사랑과 죽음이 공존하는 삶의 본질을 통해, 순간의 소중함을 수채화빛 감성으로 그려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리뷰를 마친다.
*포토 출처: IM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