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는 왜 사라져야 하는가
"하나, 둘, 셋. 숨을 내쉴 때마다 몸이 가벼워집니다. 먼지처럼!"
폴란드 감독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와 촬영 감독 출신 "마셸 앵그레르트"가 공동 연출한 이 영화는, 제목부터 역설로 시작한다.
"첫눈이 사라졌다"라는 한국어 제목과 달리, 원제 "Never Gonna Snow Again"은 '다시는 눈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선언을 배신한다. 마지막 장면, 주인공이 사라진 후 마을에는 눈이 내린다. 이 배신은 의도된 것이다. 희망은 예고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는 메시지처럼.
2021년 아카데이 폴란드 출품작이자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판타지 아트버스터"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이 영화는 현실과 초현실을 경계없이 넘나들며 현대 사회의 균열을 들여다본다.
영화는 회색과 녹색으로 물든 숲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등장한다. 숲에서 앨리베이터로~ 이 비현실적 전환은 관객에게 선언한다. 이것은 사실주의 영화가 아니라고.
황량한 다리를 혼자 걷는 남자. 제니아(알렉 엇가프).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이민자다. 공식적으로는 "안마사"지만, 실제로는 최면술사이자 치유자다. 어떠면 그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의 정체는 영화 내내 모호하게 유지된다. 한 아이는 그를 "산타클로스"라고 부른다. 제니아 자신은 스스로 "슈퍼히어로"라고 외친다.
관객의 눈에는 예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러 사람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마지막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까.
감독들은 의도적으로 그의 정체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이기 때문이다.
플래시백을 통해, 우리는 제니아의 과거를 조각조각 맞춰간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있던 날.
그 날은 제니아의 7살 생일이었다. 하늘에서 하얀 가루가 내렸다. 어린 제니아는 그것을 눈이라고 생각했다. 생일 선물처럼 내리는 아름다운 눈.
하지만 그것은 눈이 아니었다. 방사능 먼지였다!
그의 어머니는 피폭되어 죽었으나, 제니아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상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고통을 덜어주고 시간을 멈추는 듯한 능력.
이것은 SF적 설정이 아니라 은유다. 비극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상처는 때론 특별한 감각을 만든다.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니아는 체르노빌의 희생자이자 생존자다. 그리고 그 경험이 그를 치유자로 만들었다.
제니아가 찾아가는 집들은 모두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다. 깔끔한 정원, 넓은 거실, 현대적인 인테리어... 물질적으로는 풍요롭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아프다.
한 여성은 불면증에 시달리며, 다른 이는 불안 장애를 앓는다. 또 다른 이는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한다.
그들 중엔 육체적으로 아픈 이도 있지만 대부분 정식적이고, 정신적이라기보다 실존적이다. 존재의 공허함, 의미의 부재, 관계의 단절, 자본주의 계급사회가 만들어낸 불안과 고립...
영화는 에피소드 구조를 택한다. 제니아가 방문하는 각 가정의 이야기가 하나씩 펼쳐진다. 여러 개의 작은 원들이 결국 하나의 큰 원으로 수렴되는 구조인 비네트 구조로 이루어진다.
각 가정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모두 구원을 필요로 한다. 모두 제니아를 필요로 한다.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제니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그를 무시한다는 것!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그들은 우크라이나 출신인 그를 낮춰 본다. 이민자, 노동자, 하층민...
부르주아의 시선으로 그는 단순한 서비스 노동자일 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제니아에게 의지한다. 그의 손길, 그의 최면, 그의 능력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제니아뿐이다.
이것은 현재 계급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꿰뚫는다. 우리는 우리를 떠받치는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한다. 청소 노동자, 배달 노동자, 돌봄 노동자 등... 그들 없이는 사회가 돌아가지 않지만,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제니아는 그들의 거울이다. 능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진정으로 강한 자와 겉으로만 강한 자, 영화는 누가 진짜 상류층인지 조용히 질문한다.
영화 중반, 중요한 장면이 등장한다.
제니아와 한 여성이 같은 그림을 본다. 원 안에 점이 있는 그림!
여성은 묻는다. "무엇이 보이나요?"
제니아는 답한다. "원이 보입니다"
여성은 말한다. "난 점이 보여요!"
이 대화는 영화의 핵심을 압축한다.
부르주아는 중심만 본다. 자기 자신, 자신의 문제, 자신의 세계, 원은 보이지 않는다. 경계는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전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제니아는 원을 본다. 전체를 구조를 관계를... 점만이 아니라, 점을 둘러싼 공간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이것은 계급의 차이이자 의식의 차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구조이기도 하다. 여러 에피소드(점들)가 결국 하나의 주제(원)로 수렴된다.
제니아가 방문하는 여성들 중 몇몇은 그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제니아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들의 욕망은 계급적이고 착취적이다.
단 한 명, 비카(베로니카 로사티)만은 다르다.
비카는 암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다. 그녀는 제니아를 비화하지 않는다. 동등한 인간으로 대한다. 그리고 제니아는 그녀를 사랑한다.
흥미롭게도 비카를 연기한 배우는 제니아의 어머니 역도 맡았다. 1인 2역.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카는 제니아가 잃어버린 어머니의 대체일 수도 있다. 혹은 어머니만이 그에게 베풀었던 무조건적 사랑의 재현일 수도 있겠다. 계급도, 국적도, 조건도 없는 순수한 관계.
그들의 관계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연결이다. 치유자도 치유받아야 한다. 구원자도 구원이 필요하듯...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핼러윈 파티에서 펼쳐진다. 마을 사람들은 제니아에게 마술쇼를 요청한다.
제니아는 무대에 선다. 천으로 몸을 가린다. 그러고 나서 사라진다.
사람들은 당황하면서 트릭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제니아는 정말로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 시퀀스는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메시아적 해석: 예수가 승천했듯, 제니아는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떠났다.
사회비판적 해석: 이민자 노동자는 필요할 때만 보이고 필요 없으면 사라진다.
실존적 해석: 구원자는 영원히 머물 수 없다. 진정한 치유는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감독들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라짐 그 자체다. 존재했지만 이제 없다. 있었지만 떠났다!...
제니아가 사라진 후,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영어 제목 "Never Gonna Snow Again"은 "다시는 눈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눈은 온다. 충만하고 아름답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니아의 첫 기억 속의 "눈"은 사실 방사능 먼지였다. 죽음의 재였다. 하지만 마지막 눈은 진짜 눈이다. 순수하고 하얗고 아름다운...
눈은 희망의 상징이다. 정화의 상징,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다.
제니아가 사라졌지만 그의 치유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가 없어도 세상은 조금 나아졌다. 다시는 눈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눈은 내렸다.
이것은 감독이 말한 "기후 변화"의 은유이기도 하다. 지구는 회복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작은 실천들이 모이면,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이 흐른다.
이 곡은 많은 영화에서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시대의 작곡가였다. 억압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예술가가 아닌가.
제니아가 태어난 곳도 소련의 영향권이었으며 체르노빌은 소련의 비극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는 그 시대의 향수이자 비극의 메아리다.
왈츠는 춤곡이다. 하지만 영화 속의 왈츠는 비애적으로 아름답지만 애잔한데 이것이 영화 전체의 톤이 되어준다.
판타지이지만 현실적이고, 희망적이지만 비극적이며 아름답지만 슬픈!...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감독과 촬영감독 마셀 엥그레르트의 공동 연출은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이다.
슈모프스타는 이야기를, 앵그레르트는 이미지를 책임진다. 그 결합이 마법적 사실주의를 만들어낸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없으며 카메라는 매끄럽게 둘 사이를 오간다. 관객은 언제 현실이 끝나고 환상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의도다.
색감도 특별하다. 회색, 녹색, 갈색의 차가운 톤이 최면의 세계에서는 지배적으로 보이며, 가끔 따뜻한 색이 스며들기도 한다. 제니아와 비카가 함께 있을 때처럼...
프레임 구도도 계산적이다. 제니아는 종종 중앙에 배치되지만, 가끔은 프레임 밖에 있다. 그는 중심이지만 동시에 주변인이다...
제니아 역의 알렉 엇가프는 이 영화의 발견이다.
말이 적고 표정 변화도 크지 않다. 하지만 화면에 나오는 순간 시선을 뗄 수 없다. 신비로운 카리스마가 있다.
그의 얼굴은 동화적이면서 현실적이다. 소년 같으면서 성숙하고 선하면서도 위험해보이는데 이 모호함이 제니아라는 캐릭터를 완성한다.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후, 그가 누구인지 검색하게 된다. 이 배우는 누구인가? 다른 작품은 무엇이 있나? 그의 존재감은 그만큼 강렬하다...
하지만 영화는 완벽하지 않다.
가장 큰 아쉬움은 서브 플롯의 부재다. 몇몇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등장했다가 슬며시 사라진다.
예를 들어, 제니아의 과거는 충분히 탐구되지 않는다. 체르노빌 이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어떻게 폴란드까지 왔나? 왜 안마사가 되었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도 단편적이다. 각 에피소드가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스쳐 지나가는 느낌...
이것은 의도적일 수도 있다. 제니아처럼 모호하게 남겨두는 것!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아쉽다.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었다면 더 풍부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구원자는 왜 사라져야 하는가?
제니아는 사람들을 치유했다. 고통을 덜어주었다. 희망을 주었다. 그런데 왜 떠나야 했을까?
첫 번째 답: 구원자가 영원히 머물면 사람들은 의존한다. 스스로 일어설 수 없게 된다. 진정한 치유는 자립이다.
두 번째 답: 구원자 자신도 쉬어야 한다. 계속 줄 수 만은 없다. 그도 인간이며 떠날 권리가 있다.
세 번째 답: 사라져야만 신화가 된다. 있는 동안에는 평범하다. 없어진 후에야 그의 가치가 빛난다.
영화는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각자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판타지 아트버스터라는 말을 하게 되는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는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갖춘 판타지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둘을 균형있게 담아냈다. 로튼 토마토 94%. 메타크리틱 73점이라는 높은 평가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난해한 영화이기도 하다. 명확한 답이 없다. 플롯보다 분위기가 중요하다. 이해보다 느낌이 우선한다.
어떤 이에게는 지루할 수 있으며 다른 이에게는 불친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본다면 이것은 보석같은 영화다.
체르노빌의 비극, 기후 변화, 계급 갈등, 이민자 차별, 실존적 불안,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가 이 영화 안에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
우리는 서로를 치유할 수 있을까?
제니아는 사라졌지만, 눈은 내렸다. 이것이 감독들이 건네는 조심스러운 희망이 아닐는지.
* 예술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 상업 영화의 빠른 전개보다 느린 호흡과 은유를 즐기는 분
*폴란드/동유럽 영화 팬: 체코, 폴란드, 루마니아 등 동유럽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사랑하는 분
*사회비평적 작품 선호: 계급 갈등, 이민자 문제 등을 다룬 영화에 관심 있는 분
*배우 알렉 엇가프의 팬: 그의 모습과 연기를 사랑하는 관객들
*마법적 사실주의 장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
*명확한 플롯과 빠른 전개를 원하는 관객
*모든 것이 설명되는 영화를 선호하는 분
*상업 블록버스터 액션을 기대하는 분
1위: 오프닝 시퀀스 숲에서 엘리베이터로 이어지는 초현실적 전환,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단번에 보여주는 시작!
2위: 원과 점에 대한 대화: 계급과 의식의 차이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 장면
3위: 마술쇼 사라짐. 제니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감독의 필모그래피:
*인 더 네임 오브(2013) 베를린 영화제 테디상 수상
*바디 (2015):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수상
*얼굴(2018):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수상
*인피니트 스톰(2022): 나오미 왓츠 주연 실화 기반 영화
*감독: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미셸 엥그레르트(공동연출)
*주연: 알렉 엇가츠(제니아), 마야 오스타쉐브스카(마리아), 베로니카 로사티(비카/엄마)
*장르: 판타지, 드라마, 마법적 사실주의
*러닝타임: 115분
*제작국: 폴란드, 독일
*제작연도: 2020년
*한국 개봉: 2021년 10월 20일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배급사: 모쿠슈라픽쳐스
*제 7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공식 초청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폴란드 공식출품작
*폴란드 영화상 7개 부분 후보, 폴란드 영화상, 촬영상 수상
*전주국제영화제, 베르겐국제영화제 등 9개 영화제 초청
*15개 주요 부문 노미네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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