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_38. 영화 <킬링 로맨스>
1.
내 기억 속 이원석 감독은 영화 본편보다는 인터뷰 내용으로 남아있다. 영화 <남자사용설명서> 홍보차 한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원석 감독은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에 대한 짧은 의문점을 듣게 된다. 영화 후반부 내용이 일하는 여성에 대한 애환을 담은 이야기로 갑자기 틀어져 앞선 내용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다 마무리되는 것 같다는 평가였다. 이원석 감독은 짧게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다음 얘기였다. 그는 약간 멋쩍하게 웃으며 '다음에 잘할게요, 첫 영화잖아요. 다음에 잘할게요'라고 이야기해 다른 출연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는데, 이를 보며 '참 재밌는 사람이네'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명하다.
이원석 감독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예매율 1위 기념이라고 목에 깁스까지 하고 촬영하던 그 프로그램에서 만큼은 다소 민망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자아내고, 불리한 상황도 뻔뻔하게 대응하는 참 넉살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감독의 그런 모습은 작품에서도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영화 <킬링 로맨스>는 <남자사용설명서> 이후 10년이나 지난 후 내놓은 작품이지만 그 넉살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
톱스타 '여래'는 끔찍한 발연기를 펼치고 듣게 된 비난과 조롱에서 벗어나고자 남태평양의 꽐라 섬으로 떠난다. 여래는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조나단'과 결혼을 하게 되고 배우가 아닌 새 인생을 살고자 연예계를 은퇴한다.
여래의 열렬한 팬이었던 '범우'는 서울대를 꿈꾸지만 공부에는 영 소질 없는 4수생이다. 입시의 지옥에서 고통받던 범우는 어느 날 여래가 옆집으로 이사 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조나단과의 비정상적인 결혼 생활에 지친 여래의 연예계 컴백을 위해 조나단 살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과연 범우와 여래의 조나단 살인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3.
참 이상한 영화다. 여기서 이상하다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할지는 관객의 취향에 달려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이상하다. 이런 느낌의 코미디 영화가 지구 어딘가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지식이 짧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봤던 한국 코미디 영화들 중에서 이런 영화는 유일하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의외로 코미디가 아닌 전반적인 미술 스타일이다. 전반적으로 또렷한 색상들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색감은 꽤 강렬하며, 인공적인 미가 느껴지는 세트는 웅장하기까지 하다. 이 외에도 의상, 소품, 미술 등 눈에 띄는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이런 것들이 함께 뭉쳐져 나온 것은 의외로 웨스 앤더슨이다. 과연 누가 한국 코미디 영화에서 웨스 앤더슨의 미장센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런데 <킬링 로맨스>는 이걸로도 부족했던 것 같다. 영화는 심지어 뮤지컬 장르까지 들고 온다. H.O.T의 '행복'과 비의 '레이니즘'은 아마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지 않았을까 싶다. 뮤지컬도 그냥 뮤지컬이 아니다. 최종 전투씬(?)은 발리우드 군무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영화 속 코미디는 대부분 뜬금없는 상황 비틀기와 말장난에 기대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한번 SNS나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본 듯한 각종 '밈'들을 집어넣었다. 또 '슥컥훅'이나 '푹쉭확쿵' 같은 의성어를 더하기도 하는데 이것들이 한데 모여 묘한 리듬감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웨스 앤더슨의 미장센을 배경으로 말장난하는 사람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훑는 영화다. 그런 게 어딨냐고? 나도 보면서 믿기 힘들었다. 이런 과감한 혼합과 비틀기는 모든 것이 과함에도 영화를 질리지 않고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4.
이런 황당함을 담은 코미디 영화지만 어쨌든 가스라이팅과 가정폭력으로 인해 망가진 인생을 벗어가는 한 여성의 우여곡절을 다루는 영화다. 또, 과도한 경쟁체제 속에서 4수까지 하면서 서울대에 목메느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찾지 못한 누군가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 황당함 속에서도 어떤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의미다. 무거운 주제들을 너무 가볍게 다루지 않나,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애초에 그런 영화다. 과하게, 그리고 가볍게. 영화 중반부 이후로 쳐지는 감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여래의 복귀작을 바라보며 박수 치는 범우의 모습을 봤을 때 퍽 감동을 느낄 수 있다.
5.
결론적으로 <킬링 로맨스>는 소위 B급 영화의 감성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 봤을 때는 때깔 좋은 화려함을 보여준다. 소위 '키치함'을 추구하는 영화라면 응당 이래야지, 하는 모습들을 그럴듯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과연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다. 물론 이미 한참 전에 영화 상영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흥행 결과는 나왔지만 관객이 기대보다 적게 들었다고 해서 이 영화를 못 만든 영화로 치부하는 것은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받아들이는 관객은 조금 적었을지언정, 아마 꽤 오랜 시간 기억될 것임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