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_39. 영화 <더 납작 엎드릴게요>
1.
언제부턴가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 매번 무언가 빠뜨리고, 놓치고, 틀려서 혼나기 일쑤에 일 못하는 누군가로 소문까지 났지만 그럼에도 이 일에서 나름대로의 뿌듯함을 느낄 때가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렇게 영화를 봐대더니 결국 남들한테 영화 보여주는 일을 하는구나' 하는 자조 섞인 농담도 친구들과 한 번씩 하곤 하는데, 어쨌든 다른 사람들의 영화관람을 위해 힘쓰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나는 영화제에 가는 것이 그렇게 좋다. 단순히 좋기만 할 뿐이랴, 나의 1년은 영화제를 기준으로 흐른다. 일종의 절기처럼, 한 해의 몇몇 분기점을 큰 영화제들로 삼아 1년을 계산하곤 한다. 지난 9월 26일,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무리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명실상부 국내 최대 영화제인데 심지어 30회였으니, 나에게는 무조건 가야만 하는 성대한 영화 축제가 될 것임은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2.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남에게 영화를 보여주느라 정작 나는 영화를 제때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엊그제 일이다. 목이 빠져라, 아니, 실제로 목이 몇 번 빠졌던 것 같은 부산국제영화제를 향한 오랜 기다림의 끝에 내가 선택한 것은 '예매 취소'였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누벨바그 시대를 다룬 신작도, 상영관 문을 꼭 닫고 모든 관객들에게 해줬다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사인도 나는 보지도, 받지도 못했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영화제에 관심을 가지고 방문하기 시작했던 이래로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지 못한 것은 아마 올해가 처음인 것 같다. 그것도 하필 30주년 때. 차마 내 손으로 취소하기 너무 슬픈 나머지 친구에게 대신해주기를 부탁한, 그러나 청승 떨지 말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나 듣고 직접 취소하게 되었던 그 부산국제영화제 티켓들은 그렇게 저 멀리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날 무얼 했느냐고?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러 갔다. 아무래도 그래야지. 내 직업은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니까.
3.
영화 <더 납작 엎드릴게요>는 오피스 드라마 형식을 한 코미디 영화로, 법당 소속 불교 출판사에서 5년째 근무 중인 혜인과 그 주변 인물들의 여러 이야기를 묶은 영화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직장인들의 애환을 담은 에피소드들을 살펴보고 있자면 공감의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극 중 혜인은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가진 인물이다. 아마 그녀가 출판사에서 일하기 시작하게 된 이유도 글과 가까운 직업이라는 이유였으리라. 그러나 혜인이 하는 업무 중 그나마 글과 관련된 일은 다른 사람의 글 교열을 봐주는 것 정도 일 뿐, 작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는 보기 힘든 별개의 일들이 하루 업무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혜인은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하루에 단 몇 줄이라도 작성하고자, 그러니까 작가의 꿈에 조금이나마 다가가고자 퇴근 후 노트북을 가지고 카페에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신도들에게 시달린 그녀에게 창의력을 낼 수 있는 체력도, 정신력도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그대로 쓰러져 마감시간까지 잠만 자다 집으로 향하게 된다.
4.
사는 게 다 그런가 보다. 글이 좋아 글을 다루는 직업을 갖게 되었지만, 결국 글을 써야겠다는 원래의 목표는 오히려 뒷전이 되고 일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직업이 되고 사회생활이 되는 이상, 결코 전과 같을 수가 없다. 나 또한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이 너무 좋아 다른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보는 것과 남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라는 것은 물론 알고 시작했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다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정작 영화볼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혹은 너무 늦게 일이 끝난 피곤함에 극장이 아닌 OTT를 통해 영화를 보는, 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할 때마다 <더 납작 엎드릴게요>의 혜인의 상황이 크게 공감되곤 한다. 어쩌면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내 자아를 실현하는 것보다는 나를 구성하는 무언가를 포기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영화는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사실 영화의 만듦새가 썩 만족스러운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애환 담긴 유쾌함을 즐기고 있으면 적어도 직장인들에 대한 소소한 위로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보며 나도 한번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 안에 있는 소소한 즐거움들을 찾고 유쾌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 보자고 생각을 다시 가다듬어본다.
5.
부산국제영화제를 그것도 30주년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지 못한 것은 못내 슬픈 일이지만 결국 어쩌겠는가, 일이라는 게, 그리고 산다는 게 다 그런 일이지 않겠는가. 그저, 내년 30회를 맞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꼭, 그곳에서 한 일주일 정도 집에도 안 들어가고 영화만 봐야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다짐만 할 뿐이다. 그것이 하고 싶은 일이든 하기 싫은 일이든, 세상 모든 직장인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