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 같은 장항준 식 코미디에 사극 더하기

2026_06. 영화 <왕과 사는 남자>

by 주유소가맥

1.

사극 배경의 영화 리뷰들을 볼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우스갯소리로 '역사가 스포일러'가 있다. 의무 교육이라는 게 존재하고, 한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는 이상, 사극이란 이미 어떻게 될지 결과를 알고 보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 물론 세세한 정보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세조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 단종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그 정도의 큰 틀은 얼추 알고 있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당한 스포일러를 통해 생각해 보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슬픈 결말로 내닫을 수밖에 없는 영화다.


2.

그렇다면 키 포인트는 과정이다. 병자호란의 마지막이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전쟁에서 이길까, 질까를 가지고 흥미를 유발할 수는 없다. 이를 영화로 만들려면 청에 항복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다뤄야 한다. (영화 <남한산성>)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시인의 최후를 알고 있음에도, 관객들이 영화를 찾게 만드는 동력은 한 인물의 결말보다는 살아온 삶의 궤적이다. (영화 <동주>) 쿠데타를 결국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수도경비사령관이 어떻게 끝까지 반란군 세력에게 저항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 <서울의 봄>)


왕과 사는 남자 포토 (5).jpeg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같은 맥락으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단종의 최후가 아니다. 물론 영화 말미를 흐지부지 끝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만큼 그 결말까지 가는 과정이 어쩌면 결말보다도 더 중요해진다. 아쉬운 점은, 이번 영화가 그 과정을 충실하게 채워 넣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3.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광천골은 다소 예스럽게 느껴져 당황스러운 카메라 무빙과 클로즈업으로 등장하는데, 아쉽게도 이런 구도와 시선이 영화 내내 이어진다. 영화 초반, 영화가 기대고 있는 것은 장항준 감독 작품 특유의 농담 따먹기다. 이 부분에서 다소 과한 면이 있어 영화 후반의 급격히 어두워지는 극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않는다. 물론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비를 활용하는 것은 비극을 강조하는 효과적은 방법임은 맞지만, 이를 제대로 구현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특히 극 초반부 과한 톤의 대사가 길게 이어지다 보니, 유해진 배우가 대사를 풀어내는데도 불구하고 장면의 활력이 쳐지는 감이 있다.


왕과 사는 남자 포토 (3).jpeg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노루골 장면은 엄흥도에게 유배지 선정의 의지를 심어주어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지만, 지나치게 길다. 노루골 촌장으로 분한 안재홍 배우의 연기는 디렉팅도 일부러 과장되게끔, 튀어 보이게끔 의도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광천골의 다른 배역들의 연기 또한 과장되다 보니, 그 대비가 크게 와닿지 않는다.


4.

인물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는 부분에서도 부족함이 보인다. 엄흥도와 이홍위 사이의 마찰이나 갈등이 편이하게 풀어지고, 마을에 대한 애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묘사가 부족하다. 차라리 노루골 장면의 분량을 조금 덜어내고 광천골의 각 인물들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할애하였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 되는 세조는 정작 극에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상당히 현명한 선택인 것으로 보인다. 선택과 집중이 분명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선택이 모든 부분에서 들어맞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아쉬움이 더 크다.


CG 기술의 한계까지 어떻게 감독의 문제겠냐만, CG로 구현한 호랑이의 완성도가 크게 아쉽다. 10여 년 전에 개봉한 영화 <대호> 속 호랑이보다 오히려 부족한 마감을 보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는 확실히 영화의 단점으로 언급될만하다.


5.

왕과 사는 남자 포토 (4).jpeg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그럼에도 새로 발견한 것이 있다면 바로 박지훈 배우다. 물론, 이제는 여러 작품을 통해 연기활동을 보여줬기 때문에 배우라는 직업으로 소개되는 것도 어색하지는 않지만, 이전 드라마 작품들을 보지 못한 관객들에게는 '연기 잘한다' 정도로 알고 있었을 수 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이제는 영화 매체에서도 확실히 눈도장 찍지 않을까, 예상한다.


6.

설 시즌에 개봉하여 가족단위 관객들이 함께 보기 좋은 영화임은 부정할 수 없고, 관객 호응 또한 나쁘지 않게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종 관객이 어떻게 나올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조금 빠르게 예상해 보자면 꽤 괜찮게 흥행하지 않을까 예상한다. 늘 이야기하지만 상업 영화에 있어 흥행은 굉장히,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왕과 사는 남자>를 좋은 성적표로 잘 마무리하고, 아쉬움 덜한 장항준 감독의 다음 작품 준비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