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체보다는 상황이 만들어내는 영화에 대한 이미지

2026_05. 영화 <컨버세이션>

by 주유소가맥

1.

언젠가 한 영화제에서 영화 <컨버세이션>이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다. 굉장히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시간 동안 진행되는 짧지 않은 영화였는데 컷은 16개 정도로 밖에 나눠져 있지 않고, 카메라 움직임도 거의 없었으며, 이렇다 할 사건도 없었다. 가만히 인물들을 바라보는 카메라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들로만 거의 모든 영화를 채우는, 사실 자려고 하면 충분히 숙면을 취할 수 있을 정도의 정적인 영화였다. 그럼에도 꽤 재밌게 영화를 관람했는데, 그게 영화제가 개최되었던 지역 특유의 맑은 공기 탓이었는지, 아니면 우연찮게 만나 유난히 더 반가운 마음 탓이었는지 남들보다 별점 한 개 정도는 더 높게 매겼던 것 같다.


2.

영화 <컨버세이션>

우연찮게 만난 영화라는 이야기는 사실 이 영화를 볼 계획이 없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사실 그때 그 영화제에서 <컨버세이션>이라는 작품을 볼 계획은 전혀 없었다. <컨버세이션>이라는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어쭙잖은 핑계, 혹은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때 그 영화제는 같은 동네까지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지역에서 개최되었다. 그런 고로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의 시외버스 한 번으로 (많이 돌아가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었는데, 덕분에 당일 치기로 영화 한두 편쯤 보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스케줄도 가능했다.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영화 몇 편을 보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적당한 질문도 하나 던진 나는 급하게 온 것치고 꽤 만족스러운 영화제 방문이었다는 생각에 에라, 기분이다, 술이나 한잔 마셔야겠다 생각했다. 일종의 축배 정도라고 하면 얼추 비슷할까.


근처 식당에서 혼자 끼닛거리와 맥주 한잔을 시킨 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 친구에게 문득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본가에 와서 심심했는지, 함께 놀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려보던 참이라나 뭐라나. 그 친구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그 친구를 만나기 싫었다. 그 친구를 싫어한다거나 나쁘게 평가한다거나 그랬던 건 물론 아니지만, 그때는 그냥 혼자 그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던 변명이 '지금 영화제 기간인데, 그렇게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 집에 있겠냐'였다. 사실 난 그날 그 식사가 영화제 마지막 일정이었다. '내일도 영화 예매를 해둬서 여기 와야 한다'라고도 얘기했다. 당연하게도 그런 영화는 없었다. 나름 납득 가능한 선에서 잘 둘러댔다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마저 식사를 하던 그때, 그 친구에게 받은 예상외의 답변은 '그럼 같이 보자'였다. 그때 그 친구는 얼마나 심심했던 건지.


3.

영화 <컨버세이션>

그렇게 나는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게 당장 예매 가능한 다음날 영화를 급하게 찾아봤고, 영화 제목도, 내용도, 아무 정보도 없이 그저 자리가 두 자리 남았다는 이유만으로 구색 맞춰 보러 갔던 영화가 바로 <컨버세이션>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사실 내 인생에서 볼 일이 없었던 작품이었다.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본 영화가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당연히 높은 만족감을 준다. 그런데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작품이 꽤 그럴듯한 만듦새를 보여준다면, 그것도 기대 높았던 영화 못지않게 큰 만족감을 준다. <컨버세이션>은 한동안 나에게 꽤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던 영화였다.


4.

그리고 한 해가 지나고, 여러 영화제를 돌던 <컨버세이션>은 2023년 정식 개봉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며칠 지나 한 가지 더, 집 근처 독립영화관에서 <컨버세이션> GV를 진행한다는 소식 또한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도권 지역이 아닌 이상 GV 진행이 드물기도 하고, 마침 좋은 기억이 남아있던 영화였기에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혹시, 2023년에 진행된 WBC를 기억하는가? 하필이면 국제전, 하필이면 토요일 저녁에 하필이면 한일전. 대부분 사람들이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지는 않았던 경기지만, 그럼에도 구미 당기는 경기임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영화가 아닌 야구 경기를 택한다. 축구 룰도 제대로 모를 정도로 스포츠 문외한인 내가, 나조차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날은 영화가 아닌 야구를 택했다. 그리고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13:4, 압도적인 대패였다. 솔직히, 경기를 보는 내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영화 <컨버세이션>

물론 대부분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예상하긴 했고, 나 또한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큰 격차를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영화 GV까지 포기하며 봤던 경기가 이런 결과를 낸다고? 열불이 뻗쳐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불똥은 뜬금없이 야구 대표팀도 아닌 영화로 튀어, 한동안 <컨버세이션>을 생각하면 그때 그 야구 한일전 대패가 생각나 짜증을 내곤 했다. 영화는 잘못이 없다. 어쩌면 그냥 내 성격이 문제인 것이다.


5.

요는 이렇다. 영화에 대한 이미지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의외로 그 영화를 접하게 된(혹은 접하지 않게 된) 환경이나 상황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경우에 따라 그 영화에 대한 정보 하나 없이,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그 영화에 대한 이미지가 결정되기도 한다. 마치 어디서 어떻게 봤냐, 어디서 왜 보지 않았느냐에 따라 <컨버세이션>을 떠올릴 때 느끼는 내 기분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형성된 이미지는 꽤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어쩌겠는가. 우리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평범한 사람인 걸. 그 이미지만으로 영화를 보지도 않고 평가하는 일만큼은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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