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실패로 끝나버린 세계의 <소셜 네트워크>

2026_04. 영화 <블랙베리>

by 주유소가맥

1.

'블랙베리'. 참 멋진 휴대폰이다.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속 빈 칭찬이냐 싶겠지만, 진심을 담은 말이다. 나에게 블랙베리는 일종의 로망과 같은 휴대폰이었다. 어릴 적(이라고 해봤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즈음이지만),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있었다. 월가에서 일하는 증권맨, 아마 깔끔하게 올린 머리에 정장을 입고 있을 것이다. 출근길에는 늘 커피와 도넛을 사 먹겠지. 한 손에는 커피, 다른 한 손에는 도넛. 바쁘게 돌아가는 일과 시간 이전, 하루 중 유일하게 즐기는 여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반드시, 반드시 블랙베리 휴대폰을 사용해야 한다. 이 모든 이미지에 화룡점정을 찍는 것은 바로 블랙베리 휴대폰이다.


MV5BZDcxYjViMDctN2M5NC00ZWE1LTgzYWEtYTE4YzQyN2EyYTk3XkEyXkFqcGc@._V1_FMjpg_UX1918_.jpg 영화 <블랙베리>

내가 그렸던 어른의 모습은 이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미지일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증권맨이 되지 못했다. 증권맨은커녕 주식 통장도 제대로 활용해보지 못했으며, 정장은 일 년 중 몇 번 경조사 때나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걸치고 있다. 여전히 커피보다는 콜라가 입에 맞는 데다 디저트는 안 먹는다를 넘어 싫어하는 쪽이다. 블랙베리? 아이폰만 10년 가까이 쓰고 있는데, 이제는 새로운 기능을 익히는 것도 어렵고 귀찮아 구태여 다른 회사 휴대폰으로 바꿀 생각도 없다.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사람의 이미지에는 블랙베리가 들어가 있었다. 나처럼 어른들의 휴대폰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예쁜 휴대폰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부족한 성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블랙베리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보면, 확실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휴대폰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 블랙베리가 세계 휴대폰 시장을 주름잡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블랙베리>는 바로 그 시대를 다루고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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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공대 너드’인 '마이크 라자디스'는 다른 ‘너드’들과 함께 RIM이라는 회사를 창업한다. 젊은 패기에 넘치는 활력은 두말할 것 없지만, 문제는 패기와 활력만으로 굴러가는 회사는 없다는 것이다. 납품한 상품이 전량 반품되게 생긴 절체절명의 순간에 회사에 합류하게 된 '짐 발실리'는 경영상 발생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RIM의 공동대표로 취임한다.


이후 마이크는 네트워크 문제를 해결하여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휴대폰을 개발하고, 짐의 영업 능력에 힘입어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50%를 넘게 장악한다. 하지만 호시절도 잠시, 애플이 혁신적인 스마트폰 ‘아이폰’을 발표하고, RIM의 운명이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3.

우리는 언더독의 승리에 짜릿함을 느끼곤 한다. 보잘것없는 친구들이 모여 골방에서 크게 하나 터뜨릴 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가 분명 있다. <블랙베리>는 영화 초반부, 이 쾌감을 충분히 충족시켜 준 뒤,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 어떻게 틀어지는지, 회사의 방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갈등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메타'는 지금까지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회사로 남아있다는 것.


MV5BNzZhZGU0YmMtOTkwMy00ZTNmLTliMmEtM2UwZTkwMTcxZWI0XkEyXkFqcGc@._V1_FMjpg_UX1918_.jpg 영화 <블랙베리>

단순히 실화 기반 언더독의 반란이기 때문에 재밌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준수하다. 각각 엔지니어와 경영자를 대표하는 마이크와 짐이 사업을 바라보는 방식의 대비, '더그'를 비롯한 초창기 멤버들과 점점 결을 달리하기 시작하는 마이크의 변화 등을 통해 캐릭터에 이입하게 하는 방식이 꽤 그럴듯하다. 흐릿한 화질로 흔들리는 화면을 가져가는 경우가 자주 보이는데, 이런 화면들은 시트콤 <오피스> 등 모큐멘터리 코미디들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며 이는 관객들이 조금 더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리얼리티를 살린다.


4.

여느 사업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국내에도 비슷한 기업은 있었다. 코원이나 아이리버 정도가 바로 떠오른다.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다. 아마 아이폰이 출시되지 않았더라도 (꽤 긴 시간을 돌아갔을지언정) 언젠가 풀 스크린 스마트폰은 등장했을 것이다. 물리 키보드 형태의 블랙베리 휴대폰은 언젠가 쇠퇴했을 것이다. 늘상 하는 말이지만 과거에 있어 만약이란 없다. 그럼에도 약간의 혜안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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