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봤으니 남들도 봤을 것이라는 착각

2026_03. 영화 <펄프픽션>

by 주유소가맥

1.

나에게 영화는 보통 혼자 보는 것이었다. 영화의 역사가 시작된 조건에 대중 상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조건이야 나와는 상관없는 저 멀리 학자들이나 신경 쓸 법한 것이었다. 영화라는 매체가 만들어진지 이미 100년 가까이 지난 후에야 태어난 내 입장에서 감당 못할 정도로 쌓여버린 수많은 필수 관람 작품들을 볼 때마다 매번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리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규 작품도 마찬가지다. 국내 개봉하는 작품만 수백 편이다. 물론 그중에 '봐야겠다' 싶은 영화들은 몇몇 작품으로 추려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적지 않은 수다. 극장을 찾을 때마다 매번 사람을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고로 '혼자 보는 영화'는 꽤 오랜 시간 전부터 나에게 자리 잡은 개념이었다.


2.

'함께 보는 영화'에 대한 개념이 나에게 새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작년 중순쯤, 우연히 들어가게 된 영화 모임 덕분이었다. 극장 상영 시간표를 보고 사람들이 모이기도 했고,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직접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지역에서의 영화 활동이 늘 궁금했던 내 입장에서는 꽤 흥미로워 보이는 감상 방법이었다. 어쨌든 이곳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영화를 봤고, 덕분에 나 또한 몇몇 영화들을 함께 관람했다.


3.

MV5BMjI2OTk4OTg0NV5BMl5BanBnXkFtZTgwNTAwMzg5MTE@._V1_FMjpg_UX2160_.jpg 영화 <펄프픽션>

얼마 전의 일이었다. 영화 <펄프픽션>을 보고 싶던 누군가가 함께 관람할 인원을 모았는데, 그는 '시네필 연습생들' 모이라며 모객하고 있었다. <펄프픽션>이야 이미 오래전에 봤던 영화였지만, 시네필과 연습생,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 조합에 웃음이 터진 나는 그 '연습생' 무리에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물론 영화야 당연히 재밌었다. 오랜만에 본 <펄프픽션>은 여전히 특유의 재기발랄함을 뽐내고 있었다. 사실 이미 30년이나 지난 영화에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영화에서 아예 새로운 놀라움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내가 진짜 놀랐던 부분은 의외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아예 안 본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저 오늘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 처음 봐요'라고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얘기할 때마다 의문이 섞인 눈빛을 감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펄프픽션>이야 1994년 영화니 그렇다 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는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 않았나?


4.

영화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함께 본 누군가'가 있다는 것쯤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적어도 나는 꽤 오랜 시간 영화를 혼자 보며 세상과 꽤 높은 담이 쌓아놓았다. 물론 맥락맹에 고집불통, 사회성 결여, 이런 개념의 담을 얘기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다른 사람의 정도를 가늠하는 눈치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름 적지 않은 영화를, 연평균 관람 횟수보다 한두 번쯤은 더 보다 보니 언제부턴가 내가 본 것은 다른 사람들도 봤을 것이라는, 내가 아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는 뜻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 또한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내가 아는 정도라면 웬만해선 다들 알겠지'라는 예단일 것이다.


MV5BOTc4MTY2NjM5NF5BMl5BanBnXkFtZTgwNjE4OTEwMjE@._V1_FMjpg_UX1600_.jpg 영화 <펄프픽션>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단순히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에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는 대부분 영화들의 연출 또한 누군지 큰 관심이 없다. 뭐 하나 볼 때마다 어떤 감독인지, 어떤 영화인지 따져보는 것은 의외로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펄프픽션>을 보고 집에 오는 길에 새삼스럽게 이 생각을 했다. 당연한 얘기긴 하지만 혼자서 영화를 보다 보면 잊어버리게 되는,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아는 것을 내가 아는 것도 아니다'는 사실. '내가 당연히 극장에 간다고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매일 극장에 갈 것'이라는 착각. 반대로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내가 당연히 하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은근슬쩍 끼어든 '시네필 연습생 모임'은 생각보다 큰 소득이 있었다. 혼자 보는 영화도 물론 좋지만, 내가 봤다고 다른 사람들도 같을 것이라는 착각은, 이제는 지양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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