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연극, 인생이라는 역할 놀이

2026_09. 영화 <나를 찾아줘>

by 주유소가맥

1.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에이미는 본인을 소재로 한 동화 '어메이징 에이미'의 주인공처럼 되기 위해 삶의 여러 요건들을 통제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여러 대사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에이미는 인생을 자기 자신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충분히 수행하는 일종의 롤플레잉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원제는 <Gone Girl>, 즉, '사라진 소녀'로, 살해당한 것으로 위장하고 사라진 에이미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자아를 유린당한 유년기의 에이미를 의미하기도 한다.


2.

롤플레잉 게임은 곧 에이미 그 자체이자 판단 기준이 된다. 그 기준은 이미 완벽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 이유가 없다. 자기 자신이 통제 대상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인물, 더 나아가 미국 전역의 대중까지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대상은 없다. 완벽한 기준을 벗어나는, 즉 자신의 완벽히 통제된 삶을 망가뜨리는 대상은 곧 처벌의 대상이 된다.


2763E3475420C3C41C.jpeg 영화 <나를 찾아줘>

롤플레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맡은 '롤'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내는 것이며, 이 외의 가치는 수정되어야 할 게임 오류기 때문이다. 이는 실직 이후 게을러진, 다시 말해 완벽한 결혼 생활을 망치기 시작한 남편 닉은 에이미에게 있어 오류로 판단된 것을 의미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에이미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취한다. 그는 스스로 살해당한 것처럼 위장하고 그 누명을 닉에게 씌운다.


3.

한 사건을 두고 라이벌 격이 되는 두 인물이 트릭을 풀고 상대방의 정체를 밝히며, 관객들까지 그 수 싸움에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추리 영화다. 흡사 <셜록> 속 '셜록'과 '모리아티'의 대결 구도도 겹쳐 보인다. (누가 셜록이고, 누가 모리아티인지는 각자 판단에 맡긴다) 그리고 여느 작품의 최종 라이벌전이 그러하듯 닉과 에이미, 두 인물 모두 자신의 목을 걸고 싸운다.


닉이 걸고 있는 목숨은 말 그대로 생물학적 목숨이다. 미주리는 사형이 집행되는 지역이고, 정황상 법정 싸움에 들어가면 닉에게 사형 판결이 날 확률이 높다. 에이미가 건 것은 사회적 목숨이다. (비록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본인 선택지에 넣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에이미에게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목숨이 아니다. 당장 죽더라도, '그럴듯한 모습'으로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자작극이 밝혀졌을 때, 에이미가 여태까지 만들어온 '에이미', 다시 말해 사회적 목숨을 잃게 된다. 서로 얻고 잃은 것을 저울질해 봤을 때, 결론적으로 압도적인 에이미의 승리로 영화가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 대결 과정에서 두 사람은 단순히 서로 증거 찾기 정도로 끝나지 않고 법과 대중을 끌어들인다.


4.

2463E3475420C3C21B.jpeg 영화 <나를 찾아줘>

처음 이 판을 설계한 것이 에이미기 때문에 시작은 압도적으로 닉이 불리하다. 닉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항은 닉의 유불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1차적으로는 직접증거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느냐'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닉은 본인의 이미지 쇄신과 에이미의 복귀를 위해, 에이미는 닉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씌우기 위해 매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대중들의 환심을 사려한다. 그것이 이슈가 된다는, 즉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아챈 카메라는 더 과감하게 그들을 담아내고 더 자극적으로 말을 뱉어 선동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동시에 언론 영화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다루는 언론은 영화 <스포트 라이트>나 <더 포스트> 속 언론사처럼 고결하지 않다. 자본성과 선정주의에 물든 황색 언론,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이를 수용하는 무지몽매한 대중들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 속 언론은 영화 <돈 룩 업>의 그것과 같다.


<돈 룩 업> 속 언론은 단순히 TV 매체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를 적극적으로 퍼 나르고 재생산하는 SNS라는 뉴 미디어까지 포함된다. <나를 찾아줘>는 <돈 룩 업>보다 7년(심지어 원작 소설부터 따지면 9년)이나 먼저 세상에 공개되었지만 놀랍게도 이 부분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나를 찾아줘>가 개봉했던 2014년은 지금처럼 SNS 문제가 전면적으로 대두되었던 때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 내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에이미는 반박의 여지없이 SNS가 낳은 괴물의 전형이다. 앞선 글(영화 <그녀가 죽었다> 편)에서 언급한 적 있듯, SNS의 동력은 '관음증'과 '노출증'이다. 에이미는 여기서 후자의 극단적 모습을 취한다. 자신을 단순히 '이상적인 모습' 쯤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대중들이 그 모습에 현혹될 수 있는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영리하게 연출하고, 심지어 이를 완성하기 위해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각자 취하는 'SNS 관종'의 결과 노선이 다소 다르긴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가 떠오르기도 한다.


5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지만, 아마 <나를 찾아줘>처럼 이렇게까지 극단에 선 인간군상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정신병자'라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사실 '정신병자 이야기' 정도로 이 영화를 결론 내리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억울한 평가라고 생각할 것이다.(물론 등장인물들이 정상인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나를 찾아줘>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여러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냉소를 대중적으로 잘 풀어낸 작품이다. 영화 속 냉소를 풀어 해석해 보는 재미 또한 단순 장르적인 재미 못지않게 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