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_11. 영화 <스파이>
1.
마치 군대 훈련소에서 10km가 훨씬 넘는 행군 훈련을 마친 뒤 당이 떨어져 허겁지겁 초콜릿을 찾는 것처럼 한도 끝도 없이 유쾌한 영화가 당길 때가 있다. 바로 며칠 전이 그런 경우였다. 사실 웬만한 코미디 영화 하나 틀어만 놓아도 기본적인 유쾌함 정도야 찾을 수 있겠지만, 요 근래 극장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길어지다 보니 그에 대한 보상 심리가 발동한 것인지 한 편을 보더라도 왠지 검증된 영화를 보고 싶었다. 이번 경우에는 검증된 유쾌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 같다. 영화 별점 사이트를 뒤져보다 찾은 작품은 영화 <스파이>였다. <스파이>는 사실 꽤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기 때문에 그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계속 감상을 미뤄뒀던 영화였다. 그때는 뭐랄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니까 오히려 보기 싫어지는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영화 <스파이>는 '검증된 유쾌함'도 얻고, 숙제처럼 쌓아둔 영화 하나도 해치울 수 있는 좋은 선택임은 분명해 보였다.
2.
'나사 한 곳 풀려 있는 스파이 영화'라는 문장으로 영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어느 곳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박혀있던 나사가 풀린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코미디다. 코미디 영화를 표방하고 있는 작품이 코미디를 제1목표로 세우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재미없는 영화쯤이 아니라 업무 태만이자 더 나아가 사기다. 중요한 것은 코미디를 구성하는 방식인데, 이 영화는 기존 스파이 영화가 가지고 있던 모든 부분을 비틀어낸다.
3
주인공부터 남다르다. 만년 지하실 신세의 나이 많고 뚱뚱한 여성이 현장에 투입된다. 딱히 전문성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주인공 수잔 쿠퍼는 10년 동안 내근직으로만 근무했음에도 훨씬 더 오랜 시간 현장에서 일한 모든 요원들보다 훨씬 유능하다. 물론 심리싸움 같은 것도 없다. 한 명쯤은 서운해서라도 집어넣었을 법한 배신자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고, 단순하게 아군은 끝까지 아군으로 함께한다. 이쯤에서 한번 활약해주겠지 싶은 역할을 연기한 제이슨 스타뎀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허당 민폐 캐릭터쯤으로 이용된다. 제목을 '스파이'라는 단어 그대로 달아놓고, 정작 스파이 영화의 모든 특징을 빗껴나가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걸어놓은 의미심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남성 중심의 장르의 특징을 여성 서사로 치환하는 솜씨를 꾸준히 선보였던 폴 페이그 감독이 연출한 영화답게, 이번 영화 또한 클리셰를 비튼다는 영화의 특징을 전면으로 내세워 성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있다. 이런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영화들이 주로 범하는 실수가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인데, <스파이>는 그런 실수 없이 유쾌하게 극을 끌고 간다.
이런 변주 외에도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충분히 자기 몫을 해낸다. 몸이 관통되고, 손이 뚫리는 부상쯤은 아무렇지 않게 직접적으로 묘사되는데 이에 걸맞게 대사들 또한 수많은 욕설들로 가득하다. 이런 대사들은 자칫 불쾌해질 수도 있지만, 적절한 완급 조절과 영화의 전반적인 톤을 통해 그 정도를 조절한다. 어느 새부터 자리 잡은 셰이키 캠과 짧은 호흡의 편집은 이 영화에 없지만, 예스럽게 보이려 한 것인지 중간중간 삽입한 슬로 모션이 외려 키포인트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액션 영화에서 폭발하지 않는 회전익기를 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울 지경이었다.
4.
많은 사람들이 재밌게 본 영화, 다시 말해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영화라는 평가는 적어도 그 영화를 무난하게 볼 수는 있다는 뜻이다. <스파이> 또한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이야기한 그 정도까지인지는 모를지라도 앞서 말한 '검증된 유쾌함' 정도는 충분히 건네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초콜릿처럼 코미디 영화를 찾던 나에게 어쩌면 딱 맞는 처방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