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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Mar 20. 2023

20년 차 망한 게임에서 찾은 현실에 관한 알레고리

2023_16.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1.

 아마 80, 9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게임 '일랜시아'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일랜시아는 1999년, 넥슨을 통해 서비스 시작한 RPG 게임이다. 당시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유저들이 하나둘 씩 떠나고, 운영진조차 손 놓아버려 지금은 소위 '망겜'이 되었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망겜' 일랜시아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수 년째 업데이트도, 버그 수정도 없는 이 게임에 아직도 남아 있는 유저들. 그들은 왜 지금까지도 이 게임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아무래도 영화 소재부터 너무 익숙한 온라인 게임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쇠락한 온라인 게임의 자취를 다룬 영화 정도로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감상하고 나면 단순한 게임 다큐멘터리 정도가 아니라 보다 진중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게임 다큐멘터리의 틀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사회 고발 영화의 성격을 함께 가진다.


2.

 일랜시아 세상은 경쟁할 필요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실상 유토피아에 가깝다. 우리가 흔히 'RPG 게임'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레벨 시스템조차 없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직업을 얻고, 원하는 방법을 통해 돈을 번다. 말 그대로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곳'이며, 그 어떤 게임보다 평등한 곳이다.


 유저들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게임을 즐겼다. 한 유저는 미용사가 되어 다른 유저들의 헤어스타일을 꾸며준다. 다른 유저는 하루종일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끼리 만나 하루종일 얘기하며 친목을 다지기도 한다. 앞서 말했 듯 유토피아, 지상 낙원에 가깝다.


3.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과거의 영광에 지나지 않다. 도박 시스템(가위바위보), 안 쓰면 바보가 되는 매크로, 심지어 게임 자체를 진행 못하게 하는 버그 유저까지, 서비스 기간 동안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다. 유저들은 게임에 흥미를 잃고, 게임은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민심을 잃고, 심지어 운영진조차 떠난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의문을 가지고 출발한다. 남은 유저들은 왜 이 게임을 놓지 않는 것일까.


 이 하나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일랜시아의 오랜 유저이자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연출자 박윤진 감독은 일랜시아 유저들을 직접 찾아간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현실의 벽을 깨닫고 부모님 집으로 내려온 취업 준비생, 공모전도 떨어지고 성적도 잘 나오지 않았던 학생, 업무와 육아에 지친 사회인. 그들은 그들의 현실에 쉼을 주기 위한 방법으로 꾸준히 즐겼던 일랜시아를 택한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일랜시아 속에는 현실처럼 소속 자체만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곳이 아닌, 또 다른 사회가 있다. 유저들은 현실에서 하지 못한 일들을 가상현실 속에서 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가상현실 속 유저들에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이고 현실로까지 이어지는 인간관계를 새롭게 형성한다.


 어떻게 보면 유저들은 어쩌면 현실 속 도피처로 일랜시아를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지쳐 쓰러진 현실을 떠나 찾아간 곳이 바로 온라인상에서만 존재하는 지상 낙원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곳을 단순한 매트릭스로 묘사하지 않는다. 유저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지상낙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존재하는 곳이 매트릭스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이러한 자각은 무대를 게임에서 현실로 확장한다. 이 확장은 단순히 사람(과 배경)이 그래픽에서 실사로 대치된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게임이 가진 문제점들은 현실 세계의 문제점들로 확장된다.


4.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당장의 편의를 위해 편법을 쓰는 사람들, 도박장을 없애도 숨어들어 판돈을 올리는 사람들, 단기간에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그릇된 정책, 언론의 관심을 받아야만 움직이는 사회지도층,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정해진 천편일률적인 방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뭉치는 시민들, 변화의 불씨 속에 하나둘 고개를 드는 민중들, 힘든 세상 속이지만 함께 행복을 꾸리는 사람들, 언론인과 사기꾼. 이 모든 것들은 <내언니전지현과 나>에서 보여주는 일랜시아 얘기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현재 일랜시아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은 현실에 관한 강력한 알레고리다. 가상과 현실의 접점은 이 알레고리를 현실에 다시 디코딩한다.


 심지어 일랜시아가 지상낙원일 수 있었던 이유조차 현실적인 여건에 따른 결과였다. 당시 일랜시아는 월정액 게임이었다. 확실하고 안정적인 수익이 있었기 때문에 사측에서는 다른 수익성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 덕분에 개발팀에서는 수익 모델을 따로 고민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 수 있었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지금은 일랜시아와 같은 시스템을 가진 게임이 나올 수 없다. 회사가 이윤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게임이 굴러가는 동력이 되는 경쟁 시스템은 돈을 통해 우위를 점하게 되기 때문에 경쟁과 수익이 게임 개발의 목표가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어떤 경쟁이 필요 없던 게임 일랜시아가 출시했던 시기가 1998년, 대한민국 금융위기 시절이라는 것이다. 역사상 경제적 풍요를 가장 크게 누리고 있는 현세대에선 역설적이게도 국가 부도 직전도 출시되었던 경쟁 없는 게임이 나올 수 없다.


5.

 유기적으로 묶인 현실과 가상, 두 관계의 절정은 가상 세계의 길드원, 현실 세계의 사회인들이 유대하여 그들의 절대자에게 맞서는 것이다. 가상공간 속 인물이 현실로 들어오고, 가상공간이 현실을 대응하는 그 순간, 가상과 현실은 유리된 차원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랜시아의 부모이자 현실의 대기업 게임사 넥슨을 찾아간다. 모체를 찾아가는 그들의 여정을 보고 있자면 <레디 플레이어 원> 혹은 <프리 가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박윤진 감독을 비롯한 일랜시아 유저들은 일랜시아 초기 개발자, 넥슨 노조를 거쳐 결국 유저 간담회를 개최한다. 1시간 반으로 예정되어 있던 유저 간담회는 4시간이나 진행되었고 결국 2020년, 일랜시아는 2008년 이후 첫 행사 여름 이벤트를 연다.


6.

 그들이 실천한 행동의 결과를 단순히 게임 업데이트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박윤진 감독이 이룬 성과를 격하시키는 평가다. 박윤진 감독이 이끌고 온 것은 그들이 지내고 있는 매트릭스에 가져온 하나의 혁명이다. 그들이 일으킨 혁명의 결실이 비록 남들 눈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들은 어쨌든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그들의 지상 낙원을 개선시키고 또 지켜냈다. 그렇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사회 고발 영화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고대인들은 어둠의 별이 되어버린 지구에서, 마지막 희망이었던 프로토 타입과 살아남은 몇몇 소수 고대인들의 영력을 하나로 하여 일랜시아를 창조하고 이곳으로 이주합니다. 언젠가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이는 게임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일랜시아 설정 중 일부다. 유저들이 경험한 가상과 현실의 강력한 유대 후에는 단순히 판타지 설정만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꺼이 게임 유저가 되어 일랜시아로 이주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먼 훗날 그들의 일랜시아가 사라져 현실 사회로 돌아갈 때가 되는 그 날, 그때는 이 사회가 어둠의 별에서 벗어났기를 바란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4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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