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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Mar 24. 2023

술, 더럽고 유쾌한 친구

2023_17. 영화 <행오버>

1.

 생각해 보면 술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친구들과 약속이 없을 때에도 가끔 혼자 맥주 몇 캔 마실 때가 있는데, 고된 일과 끝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잔이 그게 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문제는 내 주량이 술을 즐길 만큼 세지 않다는 것이다. 술을 좋아하기도 하고 잘 마시기도 하는 것,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잘 마시지도 않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잘 마시는 것도 당연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잘 마시지 못하는 것이다. 조금 문장을 정리해 보겠다. '술을 좋아하긴 하는데 잘 마시지 못하는 것' 보다는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좋아만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 같다. 나는 이쪽이다. 술을 마시지도 못하면서 좋아만 한다.


 조금 앞서나갔던 친구들은 이르게 접하기도 했지만, 나는 정확히 20살이 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에 대한 첫 기억은 대학교 신입생 OT였는데, 소주와 맥주를 5: 5 비율로 섞어 딱 2잔을 마시고 엎어져 일행 아무나 붙잡고 사랑한다며 고백했었다. 숱한 사랑 고백 후, 택시에 실려 집에 갔던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창피해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다. 어쨌든 그날 처음 접했던 그 술은 내가 접한 어떤 것보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됐다. 술, 그 친구와의 악연이.


2.

영화 <행오버>

 영화 <행오버>는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룬다. 필과 스튜, 앨런은 더그의 결혼식을 앞두고 함께 총각파티를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떠난다. 잔뜩 취해 잠들고 숙취와 함께 깬 다음 날, 새신랑 더그가 사라졌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어디서 왔는지 모를 호랑이와 아기, 스튜의 뽑힌 치아뿐. 필름이 끊긴 셋은 이 모든 것의 출처도 알 수 없고 더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다. 과연 그들은 이 모든 미스터리를 풀고 더그를 찾아 무사히 결혼식장에 데리고 갈 수 있을까?


 영화 개봉은 2009년이었지만 내가 이 영화를 접한 것은 그보다 몇 년 뒤, 내가 스무 살이 되고 난 후였다. 그러니까, 내가 대학교 OT 날 술에 취해 집에 실려 갔던 그날 이후.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얘들보단 낫다'라는 생각이었을까, 깔깔거리고 웃으며 봤지만 지금은 그렇게 웃을 수 없다. 나에게도 '내가 저 친구들과 다를게 뭐가 있나' 생각하게 되는 잊지 못할 행오버가 있었기 때문이다.


3.

영화 <행오버>

 나를 포함한 고등학교 동창 세 친구가 모여 술을 마신 날이었다. 신나게 마시다 보니 어느덧 취기가 올라왔고, 우리는 술도 깰 겸 밖에 나와 걷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흔한 술자리 흐름이지만, 그날은 여느 날과 조금 달랐다. 술에 취한 우리는 놀이터를 발견했고, 우리는 그곳에서 교복을 벗은 이후 처음으로 과격한 몸 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흥에 오른 나는 "야, 나 한번 업어봐라!"며 친구 등에 뛰어 올랐지만, 내 친구가 나를 업는 일도, 내가 친구 등에 업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술에 취해 반응 속도가 현저히 낮아졌던 나는 팔도 한번 뻗어보지 못하고 어떤 방어 수단 하나 없이 얼굴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다친 건 나지만 아마 더 놀란 건 두 친구들이었으리라. 우리는 급하게 병원 응급실로 향했고, 보호자에게 연락하라는 병원 직원분의 말에 겁에 질린 친구들은 차마 부모님께는 연락 못하고 3살 터울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우린 어렸고, 그때는 새벽이었다.


영화 <행오버>

 어쨌든 그날 나는 코에 작은 실금이 갔고, 이마부터 턱까지 바닥에 부딪힌 모양 그대로 큰 상처가 났다. 아직도 인중에는 그때 생긴 작은 흉터가 있다. 그날 배운 신체의 신비 두 가지, 사람의 얼굴은 생각보다 튼튼하며, 흉터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얼굴이 그 모양 그 꼴이 됐으니 일상생활에도 당연히 지장이 생겼다. 나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학교를 다녔어야 했다. 그 당시 처음 만난 친구들은 당연하게도 내 얼굴을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한 상태로 한 달을 보냈다. 당시 대학 동기와 함께 충남에 가서 촬영하기로 했던 영상 스케줄은 미루다 못해 취소 됐다. 미안하다, 친구야.


 차라리 사고가 나서 다친 거다 싶으면 말이라도 하겠는데, 너무 창피한 나머지 어디 가서 다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못했다. 다들 어림잡아 짐작이야 했겠지만, 꼴에 창피한 건 알았는지 적어도 몇 년 동안 내 입에서 다친 이유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영화 <행오버>는 치아가 빠져도 유쾌했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내 인생의 행오버는 그냥, 몸만 상하고 창피하기만 했던, 어느 젊은 날의 추태였다.


4.

 너무 호되고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긴 했지만, 어쨌든 난 그날 이후로 술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태껏 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지만, 그때 이후로 취하더라도 허튼짓하지 않고 자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제는 예전만큼 취하는 날이 거의 없다. '이 나이 됐으면 적당히 조절해야지'라는 생각도 있을뿐더러, 어차피 이제 어릴 때처럼 술을 잘 받아들이는 몸 상태도 되지 못한다.


5.

영화 <행오버>

 그 이후로 또 시간이 흘렀다. 언제부턴가 친구들과 만날 때면 사는 얘기, 회사 얘기, 돈 얘기, 혹은 일행 중 누군가의 결혼 얘기로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그렇게 가볍게 한두 잔 하고 집에 가곤 한다. 좋다. 몸에 부담도 가지 않고, 아무 목표 없이 술만 들이켜던 옛날에 비해 나름 알맹이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런데 한 번씩은 그립기도 하다. 친구들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부어라 마셔라 술 마시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그때가.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 술에 취해 헛짓거리를 하더라도 웃으며 나중에 놀릴 일화 하나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던 그때가. 한 번씩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 물론 지금 그렇게 마신다면 난 얼마 가지 못해 죽을 테지만.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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