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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Jul 06. 2023

다시 찾은 영화, 찾지 않은 영화, 찾지 못한 영화

2023_32. 영화 <라이어 라이어>

1.

 '재관람'이라는 행위가 주는 특별함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재관람이란 극장에서 내리기 전 꼭 다시 봐야겠다 정도의 짧은 텀을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렇게 긴 기간 묵혀둔 영화는 단순히 '한번 본 영화'쯤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켜켜이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조심스레 열어본 추억상자에 가깝다. 열기 전의 설렘이 있고, 열고 난 후의 뭉클함이 있다. 간혹 추억상자 자체를 어디에 둔지 몰라 느끼는 답답함도 있다.


2.

 어릴 적 케이블 채널에서 깔깔거리며 재밌게 봤던 코미디 영화가 한 편 있다. 어릴 적 감상한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여느 영화처럼 그 경험 정도만 흐릿하게 남은 채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생각한 것은 그보다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그때는 그렇게 재밌는 영화들이 많았는데 왜 요즘엔 그런 영화를 찾기 힘든가'라는 일종의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회의감이라기보다는 머리만 커버린 허세꾼의 치기 어린 반항심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영화 <라이어 라이어>

 어쨌든 그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생각했다. 왠지 그 영화를 다시 본다면 당시 느꼈던 회의를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지금 현실이 행복하지 않으면 즐거웠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혹은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 욕망인지 방어기제인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얼추 그중 하나였던 것 같다.


3.

 그 영화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거짓말 못하는 변호사, 익살스러운 표정연기. 이 두 단서를 가지고 찾아야 했다. 사실 여기서 이야기가 재밌어지려면 '단서는 두 가지뿐이에요, 하시겠어요?'라는 의뢰인과 몇 안 되는 단서로 범인을 찾는 탐정이 꾸미는 후더닛 무비 정도가 나와야 하지만, 여기서 변수는 당시 내가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와 <이터널 선샤인>에 푹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영화 <라이어 라이어>

 영화를 찾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시시했다. '익살스러운 표정연기? 음, 짐 캐리인가?'라는 아주 단순한 사고를 거쳐 포털 사이트에 짐 캐리를 검색했고, '설마 진짜 짐 캐리인가'하는 의문 속에 필모그래피를 휙휙 넘겨보니 "'거짓말 못하는 변호사'라면 응당 이런 제목이지 않겠어요?'라며 나를 부르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영화 <라이어 라이어>를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4.

영화 <라이어 라이어>

 그저 느꼈던 감정만 남는 정도라 할지라도 어쨌든 추억을 만들어준 영화를 다시 만나는 일만큼 몽글몽글해지는 일이 없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는 게 팍팍해질 때마다 어릴 적 봤던 영화들을 하나둘씩 꺼내보는 습관이 생긴 것이. 그 영화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상당수 달랐고, 더 재밌게 보든, 덜 재밌게 보든 어쨌든 평가가 바뀌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다시 찾는 영화도 함께 쌓여갔고 그만큼 영화를 찾는 일에 투자하는 시간 또한 많아졌다. 추억상자를 열어 봤을 때 그 뭉클함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5.

영화 <엽기적인 그녀>

 영화 <엽기적인 그녀> 또한 그 목록에 있는 영화다. 그보다 훨씬 전에도 영화를 봤을 테고, 그중 로맨틱 코미디 영화도 꽤 많이 있었을 수 있지만, 어쨌든 <엽기적인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본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유난이라 여길 수 있지만 특정 장르에 대한 관심을 열어준 영화는 꽤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유난히 사랑하는 입장에서, 처음으로 접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가진 의미는 더더욱 클 수밖에 없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나에게 그 어떤 영화보다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6.

영화 <엽기적인 그녀>

 정말 뜬금없는 방식으로 도출된 결론이긴 하지만, 그래서 난 <엽기적인 그녀>를 다시 볼 생각이 없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처음이라는 경험은 소중하기 때문에 그 기억을 망치고 싶지 않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옛날에 본 영화기에 다시 봤을 때 더 좋아질지, 더 나빠질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냥 이 상태 그대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라이어 라이어>와는 다르다. 다시 봐서 행복해지는 영화와 더 행복하기 위해 다시 보지 않는 영화. 가끔은, 영화를 기억하는 과정이 영화를 다시 관람하는 것보다 더 즐겁기도 하다. 추억상자를 열기 전, 그때 그 설렘만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추억을 다루는 방식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가끔은 한 사람의 방식도 제각각일 때가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 않는가.


7.

 이번 상황은 추억상자를 잃어버린 경우다. 상자를 열어볼지, 닫아둘지, 아예 이런 선택조차 하지 못하는 영화다. <라이어 라이어>보다 오히려 단서가 많은 편이지만 아무리 찾으려 노력해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비슷한 것조차 찾지 못한 영화다. 이 영화 또한 어릴 적 케이블 채널에서 본 영화인데 장르는 공포고, 중화권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정 숫자(해당 문화권에서 불길한 의미를 가진 숫자였던 것 같다)를 주소로 가진 건물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설정이었다. 이상한 할머니가 주인공의 집을 뚫어져라 쳐다봤으며, 아이가 가지고 놀던 공이 가구 밑으로 들어가 주인공이 꺼내보니 공 대신 사람 머리가 나왔는데,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마지막에는 불타는 건물 속에서 주인공의 죽은 남편(혹은 남자친구)을 만나고 건물이 새로 올라갔지만 같은 주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끝났던 영화다.


8.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단서가 없어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제목은 물론이고 출연 배우도 모르고, 제작연도도 모른다. 사실 중화권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중화권이 아니라 일본 영화일 수도 있다. 동양인이 나오고 자막을 읽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 후에도 여러 방법을 통해 키워드를 짜내 검색해 봤으나 결국 다 허탕이었다. 여러 검색 엔진을 통해 이리저리 검색하다 같은 영화를 찾는 것 같은 글 하나를 발견하긴 했으나 여러 사건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사이트였기에 구태여 작성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지금쯤 그 영화를 찾았을까. 그 이후로는 그 영화도, 그 영화를 찾는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도 간절하게 그 영화를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겠지.


9.

영화 <엽기적인 그녀>

 추억상자를 어떻게 할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되도록이면 많은 영화를 만나고 싶지만 게으름 때문이든, 능력 부족 때문이든, 어릴 적 함께했던 그 모든 영화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결국 내 탓으로 오랜 시간 찾지 못한 것이다. 내 부족함에 미안할 따름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그 영화들에게 염치 불고하고 한마디 건네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너희들을 추억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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