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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Nov 10. 2023

복잡다단한 인간관계 속, 동의어가 되는 괴인과 범인

2023_50. 영화 <괴인>

1.

 사람 사이 관계만큼 미묘한 것이 없다. 차라리 선을 그어놓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허용된 범위'라며 누군가 딱 잘라 말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친절함(혹은 냉정함)을 현실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각자 언행을 주고받으며 더듬거려 그 선을 찾게 된다. 그 선을 넘느냐, 마느냐. 그리고 그 행위를 방문으로 볼 것이냐, 침입으로 볼 것이냐,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있다.


영화 <괴인>

 영화 <괴인>은 인간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영화가 가진 묘한 호흡과 낯선 흐름은 그 인간관계가 가지고 있는 선과 닮아 있다. 영화는 내내 관객들과 이 선을 가지고 짓궂은 장난을 친다. 영화 전반을 끌고 나갈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감정의 고저도 깊지 않지만 러닝타임 내내 묘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그 사소한 서스펜스 속에서도 평범한 우리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아니, 영화 전반에 걸쳐 보이고 있다. 그 사이 뜨문뜨문 실소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2.

 주인공 기홍은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목수다. 함께 일하는 친구에게 '넌 뭘 모른다'는 듯이 가르치려 들고, 전기 기사 아저씨에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핀잔을 준다. 의뢰를 맡겼던 피아노 학원 선생님에게는 괜히 허세 섞인 문자를 보낸다. 술집에서 술 한잔 기울이며 돈 잘 벌어 이런 집에서 산다며 세 들어 사는 집을 마치 자가인 것처럼 속여 말하기도 한다.


영화 <괴인>

 반면, 퇴근길 라디오 주파수까지 외워둔 채널에서 조금 전 언행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클래식을 듣는다. 마트에선 임산부에게 계산 줄을 양보하며, 심지어 영화 후반에는 자신의 차를 망가뜨린 사람에게 오히려 돈까지 쥐어주며 택시를 태워 집에 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홍은 어떤 사람인가?


 한 사람은 그저 한 사람이 아니다. 한 사람은 동시에 여러 사람이기도 하며, 그 사람이 지금 내게 보이고 있는 얼굴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얼굴이 아니다. 인간관계가 복잡하고 미묘한 이유일 것이다. 본인 스스로 여러 얼굴을 만들어내 관계의 통일성을 훼손하는 기홍은 괴인인가? 아니, 사실 그는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일상 속 누군가, 어쩌면 관객 각자 '나'의 모습과 닮아있다. <괴인>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기홍의 다면적인 모습을 보이며 기홍이 앞으로 맺을 관계의 입체성에 관하여 예고한다. 그리고 이 입체성은 관객들이 살아가며 겪는 관계의 보편성과도 같다.


3.

 기홍은 정환과 그의 아내 현정의 집에 세 들어 산다. 집 구조는 독특한데, 본채와 별채는 각각 도어락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집은 하나로 엮여 있어, 2층 복도를 통해 본채와 별채를 동시에 드나들 수 있다. 그들은 한 집에 모여 살지만,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이 선을 먼저 넘은 것은 정환이다.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를 넘어서 정환은 기홍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영화 초반 기홍이 이야기한 것처럼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추구하는 모양이다. '수평적 관계'는 극 중 꽤나 중요한 키워드다. 본채 2층 복도로 다니라는 정환의 제안을 거절하며 별채 1층 문으로 다니겠다는 기홍의 대사는 마치 수평적 관계를 추구하는 기홍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영화 <괴인>

 그러나 수평적 관계를 주장하던 기홍이 전기기사를 대하는 태도와 '노가다 중엔 목수가 제일 엘리트'라는 말은 분명 수직적 관계 인식이 기인한 것이며 그가 집주인 정환에게 유달리 친절한 것 또한 같은 인식의 연장이다. 오히려 영화 속 인물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존재하는 정환이 수평적 관계를 주창하듯 기홍에게 다가간다.


 2층 복도는 연결되어 있는 통로를, 1층 현관은 단절되어 있는 각자의 입구라는 점에서 기홍이 의식하고 있는 관계 사이의 선과 거리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기존 인식과 다르게 수직적 인물이 원하는 소통과 수평적 인물이 원하는 단절을 재치 있게 그려내는 변주는 꽤나 흥미롭다.


4.

 이렇다 할 사건이 크게 없는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중반까지 극을 이끌어간 하나의 사건은 기홍의 차 지붕이다. 어느 날 기홍의 차 지붕이 내려앉고 그 범인을 찾기 위해 블랙박스를 뒤진다. 누군가 피아노 학원에서 뛰어내렸다고 추측하고, 실제로 학원 창문에서 뛰어내린 의문의 인물을 보기까지 하지만 현장에서 잡는 것은 실패한다. 그를 찾은 것은 뜬금없게도 한 공원이다. 기홍의 차를 망가뜨린 하나는 심지어 스스로 기홍에게 찾아와 '사실 내가 그런 것'이라며 자백한다.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망가진 차를 책임지려고 한다.


영화 <괴인>

 아슬아슬하지만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던 기홍, 정환, 현정 세 사람의 관계는 기홍의 차를 망가뜨린 범인, 하나의 등장과 함께 균형이 무너진다. 하나는 기홍과의 첫 만남부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술에 취해 개인 사정도 털어놓는다. 벌이가 없지만 마치 돈을 쓸어 담는 것 같이 허세 부리는 기홍과는 달리 '여기까지는 제가 계산할 테니 와인은 대신 계산해 달라'며 지갑 사정도 공개한다. 정환은 그저 흥미 정도로, 일상의 무료를 떨치기 위해 하나를 초대했지만 하나는 그런 정환에게 집에서 며칠만 묵게 해 달라며 부탁한다.


 그렇다, 차라리 하나는 솔직하다. 솔직함은 등장인물들이 영화 내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전제사항 '인간관계는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다'는 명제를 교묘하게 빗겨나가는 속성이며, 이로 하여금 세 사람 사이에 변주가 생기고 뒤틀리기 시작한다.


5.

영화 <괴인>

 영화의 마지막, 기홍과 현정은 기홍의 방, 즉 별채에서 술을 마신다. 창문 블라인드까지 내려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다. 둘은 술을 더 찾다 함께 밖으로 나간다. 그 사이 찾아온 하나가 별채 문을 두드리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단절된 공간 속 메아리 칠 뿐이다. 이 메아리를 들은 것은 정환이다. 그는 2층 복도에 하나를 들인다. 이는 곧 관계의 연결 속에 들어선 솔직함이다. 기홍과 현정은 선을 넘었고, 정환의 표정은 굳어진다. 각자의 다면적인 입장을 가지고 유지되고 있던 관계는 솔직하게 본인의 감정을 드러냈을 때, 비로소 깨진다.


 '이 사람이 진짜 누구인지',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답은 필요하지 않다. 하나의 거미 문신을 보고 '거미가 동물인지 곤충인지 뭐가 중요하냐'며 뱉던 극 중 대사처럼,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인간관계에서 각자가 가진 진짜 얼굴과 진짜 생각은 필요치 않다. 다만 서로에게 모든 것을 보이지 않기에 생기는 약간 꺼림칙한 의문 속에서도 구태여 진짜를 찾으려 들지 않고 적당히 유지하는 거리와 균형을 맞추는 선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관계란 참, 미묘하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4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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