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13. 영화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
1.
고릴라 나오는 영화가 재미없을 수는 있다. 공룡이 나오는 영화가 재미없다, 이건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건물만 한 고릴라와 열선 내뿜는 공룡이 싸우는 영화가 재미없다면, 그건 문제가 크다. 재미없게 만드는 것이 더 힘든 소재 아닌가.
커다란 괴물에 반응하는 심장은 어쩌면 유전자 깊숙이 새겨진 본능에 가깝다. 우리 모두 어린 시절 공룡 이름 백 가지 정도는 외우고 다니지 않았는가. 괴수 영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공룡 이름을 열심히 외우고 있는 현역 어린이, 혹은 공룡 이름보단 주식 종목이 훨씬 익숙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공룡을 잊지 못한 나이 든 어린이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건물만 한 괴물을 보면 가슴이 떨린다. 나는 아직도 영화 <퍼시픽 림>을 숭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질라의 팬도, 콩의 팬도 아니지만 나에게 '몬스터버스 시리즈'는 '어쨌든 일단 보긴 해야 하는 영화'인 것이다.
2.
영화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는 할로우 어스 깊은 곳에서 동족과 마주하지만 예상 밖의 위협을 마주하게 된 콩, 정체를 알 수 없는 신호를 받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고질라가 위험에 빠진 할로우 어스를 위해 힘을 합쳐 싸우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다수 괴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 역시 괴물들이 벌이는 싸움에 초토화되는 도심과 작은 체구에서는 절대 뿜어져 나오지 못할 육중한 파워가 중심이 되는 영화다. 다시 말해, 액션 하나만 믿고 가는 영화라는 의미다. 다만, 액션 하나만 믿고 가는 영화라는 이야기가 액션만 좋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수학에서 1등급 맞을 것이라 생각하고 수학만 믿은 채 수능을 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머지 과목에서 9등급을 맞으면 심각한 문제이지 않겠는가.
같은 맥락에서 이 영화는 액션 장면들은 그럭저럭 재밌게 볼 수 있음에도 '재미없게 만드는 것이 더 힘든'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불만족스러운 지점들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 덕분에 평가가 애매해진다. 웬만한 것은 수용하겠다는 마음가짐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실망을 안겨주는 지점들, 혹은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들. 오늘은 장점보다는 기어이 도달한 그 지점들을 위주로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3.
가장 먼저, 이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액션. 몬스터버스 시리즈뿐만 아니라 비슷한 결을 가지는 시리즈들의 관객들이 가장 많이 바라는 것이 '쓸데없는 인간 서사를 줄이고 괴수를 한 번이라도 더 보여줘라'다. 이번 작품은 전작과 비교해 확실히 인간 서사의 비중을 줄이고 그만큼 괴수 액션 분량을 풍부하게 집어넣어 말 그대로 '괴수'를 보러 간 관객들이라면 만족했을 것이다.
전작과 비교해 액션 스타일이 꽤 바뀌었는데, 물론 <고질라 VS. 콩> 또한 비교적 화려한 액션을 많이 보여주었지만 이번 작품은 아예 가볍고 시원한 액션을 목표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콩은 두말할 것 없고, 나름 육중한 움직임을 위주로 선보였던 고질라 또한 뛰어다니다 못해 아예 프로 레슬링이 연상되는 액션을 구사한다. 콩도, 고질라도, 이족보행을 하는 괴수들이 보여주는 액션은 전작보다 훨씬 더 인간에 가까워졌다. 이 점에서 많은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예상한다. 다양한 모션을 통해 시원하게 유효타를 주고받으며 때려 부수는 액션을 기대했다면 크게 만족했을 것이고, 날 것 그대로의 육중하고 야수 같은 움직임을 기대한 관객들은 '무슨 괴수가 이래'라며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4.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못 하는 괴물들로만 이야기를 채워 넣으면 영화를 제작하는데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스토리를 진행하는 역할은 사람 맡을 수밖에 없는데, 냉정하게 말하면 사람들의 역할이 형편없게 수행된다. 말 그대로 여러 괴수들 사이의 싸움을 보여주기까지 시간을 끌고 갈 최소한의 단초를 제공해 주는 정도에 그친다. 이는 비단 이번 작품 뿐만 아니라 몬스터버스 시리즈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점에 가깝다. 영화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이쯤까지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다는 것은 사실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과 같게 느껴진다.
5.
이번 편의 메인 빌런이 되는 스카 킹는 여러모로 애매한 캐릭터다. 콩과 같은 유인원 계열이지만 외적인 부분에서 차이점을 주기 위해 고릴라가 아닌 오랑우탄쯤의 외형을 하고 있다. 덕분에 콩보다 슬림하고 팔다리가 긴 외형을 하고 있는데, 채찍을 중심 무기 삼아 민첩하게 움직이며 상대를 제압하는 액션 스타일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보는 맛이 꽤 있는 편이다.
하지만 메인 빌런으로서의 위압감은 부족한 편이다. 콩과 고질라에게 우위를 점하는 장면들이 몇몇 나오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압도하지 못하는 위력을 보여주어 후미에 가서는 민첩한 외형이라기보다는 왜소한 외형으로 느끼게 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스카 킹에 대해 '인류의 어두운 부분을 확대했다'며 이야기했지만, 정작 극 중에서 해당 사항은 상당히 얄팍하게 묘사된다. 힘의 우위를 기반으로 동족 위에 군림한다는 점은 분명 인류의 어두운 부분인 것은 맞지만 극 중 표현이 말 그대로 힘을 통해 괴롭힌다 수준으로 단순하다. 결과적으로 확대된 것은 신체 사이즈 정도에서 그친다. 인류의 어두운 부분을 확대하여 포착하고 엄청난 위협을 주는 유인원들을 즐기고 싶다면 차라리 영화 <혹성탈출> 시리즈를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6.
개인적인 취향이 강하게 들어간 의견이지만, 이상하게 몬스터버스 영화들은 갈수록 매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지난 2014년 개봉했던 <고질라>를 굉장히 매력 있게 봤기 때문에 그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구체적인 설정을 넣어 세계관을 넓히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영화 <고질라>의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온 것은 괴수를 괴수 자체로 묘사하기보다는 재난에 가까운 어떠한 것으로 묘사한 부분이었다. 극 중 고질라는 한 마리 괴물이었던 것도 맞지만 괴물 그 자체라기보다는 재난 혹은 재해 개념을 은유하여 의수화(擬獸化)한 것에 가까웠다. 때문에 영화가 진행되는 방식이나 전반적인 분위기 또한 재난 영화의 특징을 기저에 많이 깔아 두고 있다.
하지만 <고질라> 이후 개봉한 시리즈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콩: 스컬 아일랜드>, <고질라 VS. 콩>, 그리고 이번에 개봉한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까지 <고질라>에서 보여줬던 재난 영화와 같은 분위기는 찾이볼 수 없다. 재난에 가까운 괴수를 바라보는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괴수들의 싸움을 신명나게 보여주는 것에 충실하다. 물론, 1편의 진행 방식에 많은 사람들의 호불호가 갈렸고, 관객들이 커다란 괴물이 나오는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가 있다 보니 이런 식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것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1편의 압도적인 분위기를 좋아했던 입장으로서는 아쉬울 뿐이다.
7.
여기서 연장되는 얘기는 세계관 확장이다. 현재 몬스터 버스는 '할로우 어스' 설정을 적극 도입하여 콩을 위시한 세계관 확장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괴수들 사이에 서사를 부여하고, 그 설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될수록 캐릭터가 가진 매력이 오히려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앞서 말했던 <고질라>에서 느꼈던 재난영화의 매력을 살리고자 했다면 고대의 잊혀진 왕국 같은 설정은 필요 없다. 인간이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재난에 설정이 붙어 이것저것 구태여 설명하려고 하니 너무 과하고 공포감이 떨어진다. 적당히 가리고 은근하게 내비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마치 은근하게 흘려놓던 설정들을 급하게 구체화시키고 성급하게 확장시키느라 오히려 그 매력이 반감되었던 <존 윅 3>의 사례가 떠오르기도 한다.
8.
덧붙여 제목이 왜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인지 모르겠다. 지난번 <고질라 VS. 콩>에서도 그랬지만 영화 대부분을 끌고 가는 괴수는 콩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고질라는 콩이 부딪힌 난관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서포터에 가깝다. 이번 편의 부제인 '뉴 엠파이어' 또한 콩의 무대지 않는가. 영화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그 이후 작품 속 몇몇 상황, 대사들로 묘사하듯 '괴수들의 왕'이기 때문에 그런 거대한 싸움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은 알겠으나, 냉정하게 따지면 제목을 바꾸든지 분량을 조정하든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9.
사실 몬스터버스 시리즈는 항상 애매했다. 시리즈가 빠르게 제작되는 편도 아니라 시원하게 진행되는 맛도 없고, 완전 만족하기도, 그렇다고 완전 실망하기도 애매한 완성품을 들고 나와 관객들을 항상 헷갈리게 했다. 그럼에도 이번 영화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를 선뜻 보러 간 이유는, 앞서 이야기했듯 내 동심을 자극하는 거대 괴수를 중심으로 한 영화기 때문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몬스터버스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거대 괴수 시리즈가 나온다면 너무도 쉽게 그 시리즈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지금 그런 시리즈가 없고, 앞으로도 딱히 제작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문제일 뿐. 그렇기에 소위 배짱 장사가 아직까지는 통하겠지만 이제는 조금 더 완성도에 신경 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