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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Mar 23. 2024

일상의 무료와 권태, 그리고 좀비

2024_12.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

1.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

 에드가 라이트 감독을 처음 접한 것은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를 통해서였다. 영화 <스콧 필그림>이 꽤 호평 받았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당시 나에겐 그렇게까지 구미가 당기는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 <앤트맨> 제작 당시 에드가 라이트 이름이 함께 언급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페이튼 리드 감독이 연출을 맡게 되며 영화는 에드가 라이트와 한참 멀어져버렸다. 그 외 연출작은 비교적 언제쯤 봤는지 시기를 얼추 짐작할 수 있는 정도는 되니, 내가 모르는 그의 또 다른 연출작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베이비 드라이버>는 내가 처음 접한 에드가 라이트 연출작이 확실하다.


 <베이비 드라이버>가 음악/음향과 액션을 결합시키는 개성 넘치는 방식에 반해 ‘미쳐 돌아가는 2시간짜리 뮤직 비디오를 발견했다’며 친구들에게 온갖 찬양을 늘여놓곤 했는데, 그런 영화를 봐버렸으니 그의 다른 연출작이 궁금해 미치겠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 아니겠는가. 그렇게 그에 대한 찬양은 <베이비 드라이버>를 통해 <새벽의 황당한 저주>로 넘어왔다.


2.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패러디한 원제만 생각해도 알 수 있듯 좀비 아포칼립스를 위시한 코미디 영화다. 하루하루 농담 따먹기 정도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숀과 에드에게 권태로운 하루 이상의 내일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고 숀은 의붓아버지 문제로 왕래가 뜸해진 어머니, 데이트마다 눈치 없이 따라 나오는 에드와 항상 똑같은 데이트 레퍼토리, 딱히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게으른 숀이 지긋지긋해 이별을 통보한 (전)여자친구 리즈를 구하러 가게 된다.


 기존의 좀비 영화는 평온했던 세상과 좀비 사태로 인해 파괴되는 일상이 대비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 영화는 조금 다르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또한 좀비 사태로 인해 많은 생명을 잃고, 온 세상이 쑥대밭이 되는 것은 맞지만, 영화는 이를 조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를 통해 숀과 에드의 삶에 에너지가 불어 넣어지는 모습을 중점적으로 비춘다.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

 결국 <새벽의 황당한 저주>가 러닝타임 내내 지니고 있는 코어는 삶의 무료함, 혹은 권태로움이다. 주인공 숀은 전자제품 매장의 매니저로 일하지만 손님들에게 상품 설명을 할 때에도, 자기보다 훨씬 어린 아르바이트생이 본인을 무시할 때에도 한숨 몇 번 정도로 넘기는 무기력함에 찌든 인물이다. 친구 에드는 두말할 것도 없다. 출근은 커녕 집안일 하나 손 까딱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가진 삶의 낙이라곤 매일 밤 술집 윈체스터에 가서 맥주를 들이켜는 일 뿐이다. 심지어 좀비 사태가 펼쳐진 후 동네 슈퍼에 가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어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아예 깨닫지 못한다.


 이는 비단 슈퍼 방문 장면에서만 묘사되지 않는다. 극 중 등장하는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 모두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몇몇 인물들은 좀비가 되기 전과 후 하는 행동이 거의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저 조금 굼떠졌을 뿐. 뒷마당에서 발견한 좀비를 그냥 남의 집 담 넘은 평범한 사람 정도로 오해하는 장면까지 묶어 본다면 꽤 의미심장하다. 그렇다, 뚜렷한 삶의 목적 없이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좀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상의 권태에 잡아 먹힌 우리는 사실상 좀비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곧 숀과 에드의 평소 모습과도 같다. 그렇게 모두가 좀비(숀과 에드)가 되고 나서야, 다시 말해 세상이 권태와 무기력으로 쳐진 몸을 간신히 이끌고 다니게 되고 나서야 숀의 일상이 역동으로 차오르기 시작한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일상, 더 나아가 사회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지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삶의 변주를 불어 넣어주는 하나의 사건 쯤이 된다는 점은 꽤 재미있게 다가오는 역설이다.


3.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

 영화 말미, 좀비 사태가 마무리 된 후 숀과 리즈의 삶을 보여준다. 티비 속에서는 그럴듯하게 회복된 사회를 보여주지만 숀과 리즈는 좀비 사태 이전, 숀과 에드가 그랬듯 무료하게 쇼파에 앉아 멍하니 콘텐츠를 소비할 뿐이다. 에드는 어떠한가. 이미 좀비가 되었지만 숀은 여전히 에드와 함께 전자오락이나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좀비 사태는 숀의 삶에 순간의 자극이었을 뿐, 그 이후의 삶을 보장해주진 못했다.


 기존 좀비 영화와 반대로 좀비 사태에서 삶의 변주를 느꼈으니, 마무리 단계에서도 그 역을 배치해놓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좀비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낌새를 보여주며 희망찬 내일을 암시하는 것이 기존 좀비영화의 결말이었다면,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삶의 자극이 한순간 마무리 된 이후 다시 무료의 삶으로 돌아간 인물들을 보여주며 마무리한다. 삶의 변주가 사라져버린 지금, 비록 물리적 감염 사태에서 벗어났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그들이 정말 좀비 사태에서 벗어났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4.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베이비 드라이버>를 보기 전, 이 영화를 먼저 봤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보여줬던 개성 넘치는 액션의 모태가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 보인다. 숀이 어떤 방식을 이용하여 윈체스터로 도망갈지 반복하여 보여주는 방식이나, 최후 전투에서 퀸의 ‘Don’t Stop Me Now’의 박자에 맞춰 좀비들을 때려 죽이는 장면은 이후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조금 더 발전된 형식으로 차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베이비 드라이버>를 향해 가는 길을 이미 초창기 장편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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