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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Mar 16. 2024

수집, 공유, 보존, 대여점 세대 시네필 3대 행동강령

2024_11. 영화 <킴스 비디오>

1.

 데크나 셋톱박스 없이도 양질의 영상 콘텐츠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대인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딱히 와닿지 않을 수 있으나,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싶을 때 본다'는 문장은 꽤 성립하기 어려운 명제였다. '보고 싶을 때 본다'의 어려움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의외로 더 큰 난관은 '보고 싶은 영화'를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있었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전하기 전의 시대를 생각해 보면, 이역만리 타지의 영화 본편은 커녕 그 영화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들조차 어디서 구하기 힘들었음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보고 싶을 때 본다'는 '보고 싶다'는 의지가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보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를 때는 그 의지를 가질지 말지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테니. 그 욕구를 가질지, 말지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정보들이 존재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축복이지 않을까.


 과거를 돌이켜보면 콘텐츠 자체는 어떻게든 돌아다녔다. 독재시대의 서슬 퍼런 법으로도 막지 못하던 것이 콘텐츠의 유통이지 않는가. 어쩌면 영화감상에 있어 과거와 현재의 가장 큰 차이는 '보고 싶을 때 본다'가 아닌 '보고 싶은 영화'라는 개념이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또한 그 정도로 과거 시대에 직접적으로 속하진 않지만, 얼추 그 시대와 현재의 중간 위치쯤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2.

 어린 나에게 비디오 대여점은 그런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정보의 장, 그리고 그 영화들을 '보고 싶을 때 본다'는 행위를 완성시켜 준 곳이었다. 비디오 대여점은 그저 장소 정도가 아니라 콘텐츠 소비의 다리가 되는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OTT를 통해 물리적 편리함은 얻었지만, 그곳에는 대여점에서 느꼈던 두근거림이 없다.


영화 <킴스 비디오>

 안락한 현재를 놔두고 구태여 과거를 회상하며 낭만을 일컫는 걸 보면 낭만의 본질은 어쩌면 불편함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대여점은 OTT 서비스보다 훨씬 더 낭만에 가까운 플랫폼이다. 요컨대, 비디오 대여점에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낭만이 있다. 이는 비단 나뿐만이 가진 생각은 아닌가 보다. 본인이 자주 드나들던 대여점의 행방을 찾고, 이를 다시 현재로 끌어오려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영화 <킴스 비디오>는 바로 그 사람들의 이야기다.


3.

 '킴스 비디오'는 1986년에 개업한 비디오 대여점으로 5만 5천여 편이 넘는 컬랙션을 토대로 많은 인기를 구가했다. 체인점만 11개에 직원들이 300명인 데다 회원이 25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규모만 컸던 것이 아니다. 메이저 영화뿐만 아니라, 정식적인 루트로 구해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인디 영화나 제3세계 영화들을 구비했으며, 쿠엔틴 타란티노와 코엔 형제, 마틴 스코세지까지 회원으로 대여점에 드나들었다고 하니, 8·90년대 시네필들의 성지였다고 불러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킴스 비디오>는 뉴욕의 행인들에게 '킴스 비디오'의 행방에 대해 물으며 시작한다. 이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듯, 한때 뉴욕의 비디오 시장을 정복했던 대여점, 8·90년대 시네필의 성지였던 킴스 비디오는 대부분의 대여점들이 그러하듯 시대의 흐름에 굴복하고 말았다. 다만, 다른 일반적인 대여점들과는 다르게 킴스 비디오에서 수집했던 컬렉션들은 폐기되지 않고 공공의 목적을 위해 기부되었다. 킴스 비디오에서 수집했던 영화 목록들은 단순한 컬렉션을 넘어 광범위한 아카이빙에 가까웠다고 한다. 본 영화의 감독 데이비드 레드몬은 이 아카이브의 행방을 쫓는 여정을 영화에 담는다.

영화 <킴스 비디오>

 킴스 비디오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살레미에 컬렉션들을 기부했다. 당연하게도 컬렉션의 행방을 찾기 위해 제일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은 살레미다. 하지만 그 누구도 킴스 비디오 컬렉션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에서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듯, 시에서 약속했던 컬렉션의 다양한 활용은커녕 제대로 된 보관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관리 담당자조차 누구인지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그 컬렉션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것은, 그 영화들을 창고 안에 버려두겠다는 의미와 같다. 물론, 그 영화들을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킴스 비디오의 컬렉션이 그렇게 버려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영화는 이제 단순 다큐멘터리가 아닌, 하이스트 무비가 된다.


4.

 킴스 비디오 컬렉션을 되찾아 오겠다는 감독의 의지는 단순한 의지보다는 집착에 가깝다. 집착은 결핍에서 시작된다. 영화관에선 찾아볼 수 없는 나름의 큐레이션 시스템과 이를 자양삼아 발전한 커뮤니티를 생각했을 때, 비디오 대여점은 아날로그 시대 시네필들의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유일한 플랫폼이 된다. 다시 말해 킴스 비디오 또한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강한 갈증을 해소시켜준 가교였다. 폐간 후 20년이나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영화잡지 KINO를 추억하는 한국의 시네필들을 생각하면 과거로의 회구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영화 <킴스 비디오>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속성이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우리는 늙어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수렴하고 있지만 영화 속에 포착된 그 장면은 그 시절 그때 그대로 남는다. 우리가 디지털화된 기록보다 물리적인 매체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 또한 같은 이유다. 전원이 차단되면 사라질 데이터 더미 보단 물리적으로 구체화된 매체가 훨씬 영속적인 성격을 가진다. 킴스 비디오는 디지털화된 2차 영화 시장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폐업한다고 데이터 센터에 잠입해 콘텐츠를 훔쳐올 사람은 없다. 킴스 비디오 컬렉션을 향한 충성도는 영화가 가진 영속성과 대여점 세대 매체가 가진 구체적인 물성에서 나온다. 이는 기술 발전의 선형성을 생각할 때, 앞으로 더 희소해질 성격이다. 어쩌면 킴스 비디오 컬렉션은 충성도를 가질 매체의 마지막 세대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집착을 이해할 수 있다.


5.

 사실, 무언가를 훔쳐오는 것이 목표인 하이스트 장르는 이미 살레미 이전에도 존재했다. 바로 킴스 비디오 그 자체다. 조금 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김용만 씨가 킴스 비디오를 확장시킨 방법은 컬렉션을 뉴욕으로 다시 가져온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좋게 풀어 말하면 영화 문화의 저변을 넓히고 그저 그렇게 잊힐 수 있는 영화들을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온 행위지만, 나쁘고 간단히 말하면 영화 절도였다. 그 이후 후속 조치를 통해 어느 정도 정당성을 얻은 것은 사실이고, 몇몇 관계자들이 감사를 표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영화 절도였으며, 그들이 만든(혹은 복구한) 대여점은 수많은 절도품들이 모인 금고다.


영화 <킴스 비디오>

 절도 행위의 당위는 굉장히 감성적이게도 영화의 본래 성격에서 찾는다. 결국 영화가 있어야 할 곳은 관객의 품이라는 것, 영화는 누군가가 보아야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 영화들을 품은 적잖은 관객들은 먼지 나는 골방에서 볼록한 브라운관 티비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훑어보던 그 시절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절도 행위가 한낱 범죄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열성 팬들의 매니악한 행위쯤으로 만든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 이런 행위들은 시네필의 낭만 정도로 유하게 넘어갈 수 있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애당초 대여점이라는 곳이 존재하는 이유부터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영화를 모아두기 위한 공간이지 않는가. 킴스 비디오 회원들은, 더 나아가 대여점 세대의 시네필들은 여전히 내일의 영화를 보기 위해 어제를 양분으로 오늘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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