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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May 04. 2024

제 작고 소중한 우당탕탕 가족 코미디는 어디 갔죠?

2024_18.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1.

 영화를 보기 전, 이미 영화를 한번 보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이미 너무 질리도록 본, 흔한 내용의 영화이기 때문에 그 그림이 충분히 그려지는 경우다. 누구든지 예고편 하나만으로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는 영화 한 편쯤은 있지 않는가.


 물론 극장에 쏟는 돈이 크게 아깝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번쯤 '이래도 되는 건가'싶을 정도의 돈을 극장에 쏟아부어가며 수행한 혹독한 훈련 끝에 얻게 된 일종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 체화되어 버린 나머지, 1년에도 수십, 수백 편씩 흘러 지나가는 그저 그런 빤한 영화들의 예고편을 보면 나도 모르게 발동되는 능력이다. 물론 그 영화들을 평가하기 위해선 직접 봐야 한다는 나의 입장은 변함없고, 내가 예상했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훌륭한 영화들도 많이 만나기 때문에 사실상 쓸모없는 능력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2.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 능력을 벗어나는 경우가 한 가지 있다. 간혹 가다, 정말 만에 한번 정도의 경우. 쓸모없는 능력으로 미리 재생하는 경우는 여태까지 쌓아온 데이터를 통해 나름대로 추론해 낸 경우지만, 이 경우는 정말 최소한의 단서만으로 머릿속에 혼자 영화 한 편을 뚝딱 창작하는 경우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가 통계에 가깝다면 후자는 창작에 가깝다.


3.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른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을 처음 접한 곳은 한 영화제였다. 굿즈 같은 것은 부피도 크고, 후에 보관하기도 애매하기에 엽서나 포스터 같은 것들이 모여 있으면 기웃기웃하며 그럴듯한 디자인의 엽서를 하나 둘 골라오곤 했다. 그날도 같은 이유로 엽서 모음이 있던 곳 앞을 기웃기웃거리다 이 영화를 만났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본편을 본 것이 아니라 제목을 처음 읽은 것이다.


 그 당시에 본 것은 아니라 그곳이 부산이었는지, 부천이었는지, 아니면 제3의 다른 영화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에 새겨두진 않았지만(굳이 따져보자면 부산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영화제 현장에서 만난 그 제목의 꽤나 강렬했던 인상만큼은 선명하다.


4.

 처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라는 제목을 읽었을 때, 내가 생각한 영화는 의외로 코미디였다. 같이 사는 형제자매 사이나 막역한 친구 사이에 사이즈 비슷한 옷을 한 번쯤 몰래 쓱 입고 나가는 에피소드는 주위에서 너무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옷'도 아닌 '속옷'을 공유한다는 것도, 엽서 속 두 인물의 상반된 표정과 전반적으로 톤 다운된 디자인도, 그저 그런 가족코미디로 오해하기엔 의아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럼에도 몰래 옷을 훔쳐 입고 나갔다가 걸려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형제자매의 모습을 한번 떠올리고 나니, 머릿속 이 영화에 대한 내용은 가족 코미디로 밖에 구성되지 않았다.


5.

 당연히 가족 코미디를 생각한 나는 시놉시스도, 예고편도, 그 어떤 관람평도 찾아보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향했다. 그 어떤 정보도 없이 그저 가족 코미디 영화라는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생각하며. 다들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내가 느꼈던 당혹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모성 신화를 깨부수고 싶다’는 김세인 감독 말마따나, 모녀 사이의 가정폭력을 주제로 대담하게 밀고 나가는, (좋은 의미로) 불쾌한 에너지 가득한 영화였다.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왜 이 영화 제목이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인지 이유를 보여주는데, 그때부터 나는 느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거침없이 하이킥>은 어디 갔죠? <모던 패밀리>라도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 코미디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 영화가 정말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라고요?


6.

 그러니까 결론은, (비록 뻔한 말이긴 하지만) 보지 않은 영화를 속단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순 있겠지만 좋은 관람 습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간혹 가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볼 때의 나처럼 아예 영화 감상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 전, 극장 테이블에 앉아 다음 영화는 어떨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글을 작성하는 내가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이 웃기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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