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53
후보 기준
장편: 한국 기준 2023년 12월 15일~2024년 12월 14일 개봉작
단편: 2024년 국내 영화제 상영작
올 해의 영화 (장편, 국내): 장손
후보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보통의 가족
딸에 대하여
더 킬러스
제목과 설정만 보고 단순히 가족 군상극쯤이지 않을까, 생각했다면 그건 굉장히 큰 오판이다. 영화는 가부장제를 중심으로 세대, 젠더 갈등을 가져오고 세 장손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상흔까지 끌어 안아 다층적 차원의 논의를 펼친다. 조금 과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영화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만 함몰되지 않는다. 흐르는 계절 풍경을 널찍하게 담아내고 이를 극과 긴밀하게 엮어 보는 재미를 더한다. 대가족 사이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며 흐르는 긴장감을 통해 극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여기에 한국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가족 모임 내 소소한 요소들까지, 과하지 않은 정도로 알맞게 꽉 차있다.
올 해의 영화 (장편, 국외): 로봇 드림
후보
클로즈 유어 아이즈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락의 해부
그저 엇갈렸을 뿐 아주 어긋난 것은 아니었던 어느 날의 관계에 대한 아주 사랑스러운 해설이다. 엇갈린 관계에 대한 기억은 보통 애틋하지만 원망스럽고, 행복하지만 고통스러우며, 충만하지만 동시에 결여된, 미묘한 감정 사이에 존재한다. 그 미묘함으로 인해 어렴풋한 근삿값을 제시할 수 있어도 명확한 묘사는 버거울 수 있지만 영화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말 한마디 없이 진행하는 영화에서 어떻게 이런 복잡한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지. 누구든지 이 영화를 감상한 후에는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를 전과 같이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올해의 영화 (단편, 국내외):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
후보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
금성 밴조
미트 퍼펫
빨간 열매
전작 <성적표의 김민영>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임지선 감독은 청소년들의 내면과 성장 과정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청소년 요실금이란 설정은 낯설지만 그 설정을 기반하여 발생한 사건과 변화 속, 한슬이 느꼈을 감정은 청소년 시기를 거쳤던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수치에서 극복으로 넘어가는, 요컨대 누군가의 성장을 담아내는 그 솜씨를 살펴보면 임지선 감독은 앞으로도 이런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다는 기대가 생긴다.
올해의 신인감독: 오정민 감독 (장손)
후보
김다민 감독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정지혜 감독 (정순)
남동협 감독 (핸섬가이즈)
이미랑 감독 (딸에 대하여)
오정민 감독은 <장손>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어느 한쪽에만 집중하지 않고 세 세대를 진득하게 고찰하는 구성만 보더라도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제시한 논의점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인물과 사건 틈틈이 적재적소에 엮어내는 방식이 아주 뛰어나다. 단순히 다루고 있는 이야기뿐만 아니다. 컷의 길이를 통해 영화의 호흡을 조절하고 카메라 시선과 이동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투영하는 등 화면을 구성하는 실력 또한 유려하다. <장손>은 감독의 첫 장편 연출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단단한 영화다.
올 해의 배우 (남, 국내): 최민식 (파묘)
후보
구교환 (탈주)
노상현 (대도시의 사랑법)
설경구 (보통의 가족)
강승호 (장손)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을수록 행위의 ‘그럴듯함’이 중요하다. 한국을 넘어 일본 귀신까지 동원되는 오컬트 장르에 이제는 생경해진 풍수지리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나온다면 그 ‘그럴듯함’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진다. 빼곡한 사전 조사로 아무리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한다 하더라도 그 속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텅 비어 있다면 이를 보는 관객들은 그 비현실성에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다. 최민식 배우는 이 모든 부담을 딛고 상덕이라는 인물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언제나 그랬지만, 최민식 배우의 연기에 대한 기대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올 해의 배우 (여, 국내): 김금순 (정순)
후보
심은경 (더 킬러스)
김고은 (파묘)
김희애 (보통의 가족)
오민애 (딸에 대하여)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배우의 논리는 연기에서 나온다. 어떤 배우는 연기를 선보일 때, 잊고 지내기 쉬운 그 명제를 떠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김금순 배우는 영화 <정순> 속 인물의 자포자기한 체념 상태에 개연을 주며, 순간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설득을 부여한다. 디지털 성범죄를 논의할 때 비교적 배제되었던 중년 피해자를 다뤘기에 보다 조심스러웠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 <정순> 속 논리의 한 축은 김금순 배우의 연기를 통해 구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올 해의 배우 (남, 국외): 마크 러팔로 (가여운 것들)
후보
티모시 샬라메 (듄: 파트 2)
유리 보리소프 (아노라)
니콜라스 케이지 (드림 시나리오)
조쉬 오코너 (챌린저스)
영화 <가여운 것들> 속 코미디 요소는 마크 러팔로 배우에게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파격적인 설정과 전개로 영화의 피로도가 크게 느껴질 때쯤, 마크 러팔로 배우가 연기한 덩컨이 자아내는 코미디가 완급 조절하며 숨 쉴 틈을 마련해 준다. 덩컨은 배우가 평소 연기하던 인물들과 상당히 어긋나 있다. 꽤 오랜 시간 활동한 배우임에도 아직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도 꽤 즐거운 일임은 확실하다.
올 해의 배우 (여, 국외): 데미 무어 (서브스턴스)
후보
안야 테일러 조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미키 매디슨 (아노라)
산드라 휠러 (추락의 해부)
엠마 스톤 (가여운 것들)
영화 <서브스턴스>를 완성시킨 것은 데미 무어의 호연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영화의 파격적인 전개도 전개지만 연기하는 배우가 투영되어 보일 밖에 없을 배역 자체의 설정으로 선뜻 선택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기꺼이 스파클을 연기한 그 도전 정신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작년 영화 <너와 나>에 이어 국내 올 해의 영화 또한 데뷔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국내 제작 영화 편 수와 영화관 방문객 수의 감소가 확실히 체감되는 한국 영화의 위기 속에서도 좋은 영화인과 좋은 영화는 꾸준히 나올 것이라는 작년과 같은 기대를 또 할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발견들을 증거로 한국 영화의 미래를 감히 낙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2025년, 극장에 걸릴 영화들만큼 객석을 채울 나의 삶 또한 낙관적인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올해 영화 일지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