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2020)
‘안소니 홉킨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단연 <양들의 침묵>이다. 지금으로부터 29년 전, 그는 해당 작품에서 ‘한니발 렉터’라는 잔혹한 살인마를 연기함으로써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스크린에 얼굴이 그다지 길게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영화의 분위기를 꽉 잡았다고 할 만큼 미친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다. 모든 세대가 인정하는 명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84세의 나이로, 연극 원작 영화 <더 파더>를 통해 다시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12년 크리스토퍼 플러머(당시 82세) 이후 80세가 넘는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두 번째 사례다.
느닷없이 나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작품의 내용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더 파더>는 죽음을 앞둔 남자의 일상을 일상적인 공간에서 담아내는 영화다. 따라서 주인공을 연기함에 있어 오랜 시간 삶에서 얻은 연륜과 경험에서 우러나는 감정들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했다. 영화의 감독이자 동명 연극의 연출가인 플로리안 젤러는 해당 작품을 스크린에 옮기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안소니 홉킨스를 염두에 두고 각색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의 이름 역시 ‘안소니’이다. 영화는 나이듦과 인생의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허망함을 말한다. 기억이 뒤섞이고, 자신의 딸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인물의 입장에서 카메라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상황을 체험하도록 해준다.
안소니 홉킨스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실제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전하는 등, 극중 안소니를 처음부터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머리가 아니라 경험과 감정을 토대로,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있던 인물을 연기했기에 그의 연기는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의 조단역들까지 연기력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배우들이 뭉쳐 극의 완성도를 높여주기도 했다. 특히,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올리비아 콜맨이 안소니의 딸 ‘앤’ 역할을 맡아 안소니 홉킨스와의 팽팽한 연기합을 자랑한다.
일반적으로 ‘치매’라는 병이 영화에서 묘사될 때에는 스토리의 진행을 위한 장치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더 파더>에서는 치매를 겪는 당사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의 시점을 따라감으로써 관객이 해당 인물의 심리에 공감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더했다.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월 앞에서 보호와 돌봄의 대상이 되어가는 것, 그리고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손을 쓸 수 없는 무력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안소니 홉킨스의 세월이 실린 연기를 통해 묵직한 감정을 느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