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드라큘라] 2021.06.04 관람
죽음과 사랑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나란히 놓이게 된다. 아일랜드 소설가 브람 스토커의 1897년 소설 ‘드라큘라’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드라큘라>다.
드라큘라 백작의 삶과 사랑을 그린 이 뮤지컬은, 스토리가 워낙 잘 알려져 있어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독보적인 캐릭터 하나가 이끌어가는 극인만큼 배우들이 그 캐릭터를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즉, 변화와 발전의 여지가 무한한 작품인데, 특히 연출에 여러 가지 변화가 더해진 한국 사연(2021)에서 그 빛을 발하는 듯했다.
원작 소설과 영화에서 묘사된 드라큘라 백작은 사회의 악이자 악마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뮤지컬로 각색되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그의 내면을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사연(2021)에서 드라큘라 역을 맡은 배우 김준수, 전동석, 신성록에 의해 캐릭터의 매력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드라큘라의 내면으로 초점이 옮겨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그의 사랑을 비추고, 한 여인을 향해 무려 400년 동안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보여준 드라큘라는 이제 오히려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다.
백작이 평생 품어온 사랑, ‘미나 머레이’의 역을 맡은 배우들의 역량도 극을 해석함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다. 미나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전생에 드라큘라의 사랑인 엘리자벳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후 그녀의 선택이 과연 드라큘라를 향한 순수한 사랑인지 본능과 운명에 이끌렸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국 프로덕션의 드라큘라에는 브로드웨이에 없는 넘버가 세 곡 더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She’라는 넘버는 드라큘라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미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간과 운명을 거스르는 세기의 사랑을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 등을 통해 직관적으로 표현한 장면이기도 하다.
뮤지컬 드라큘라에는 ‘시그니처’라고 불릴 만한 대표 넘버들이 존재한다. 드라큘라 백작이 1막의 초반에 부르는 ‘Fresh Blood’는 400년을 살아온 드라큘라가 신선한 피를 마심으로써 젊게 변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넘버이다. 이 넘버 전까지 드라큘라 역의 배우들은 얼굴과 손에 주름이 가득한 늙은 백작의 모습으로 관객을 만난다. 미나의 대표 곡은 'If I had wings'로, 그녀의 내적 갈등을 담은 긴박한 리듬과 후반부의 부드러운 고음이 어우러진다. 해당 곡에서는 미나가 드라큘라의 영생을 ‘영원한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등, 그녀의 앞에 놓인 선택을 암시하며 운명을 예고하기도 한다.
이 넘버들을 탄생시킨 작곡가는 프랭크 와일드 혼으로, ‘지킬 앤 하이드’, ‘웃는 남자’, '마타하리', ‘몬테크리스토’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 번 들으면 귀에서 끊임없이 맴도는 웅장한 음악들을 작곡해내는 그는 명예 한국인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작곡으로도 유명하다. 드라큘라의 넘버들 또한 한 번 들으면 쉽게 잊기 힘든 중독성 강하고 임팩트 있는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 넘버의 도입부에는 강렬한 록 사운드가 더해져 스산한 분위기 속 끓어오르는 감정을 표현해낸다.
화려한 무대장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극의 시작은 트란실바니아, 루마니아 북부에 위치한 드라큘라 백작의 성이다. 웅장한 무대 세트와 투사된 영상들은 관객을 스산한 그의 성으로 데려가기에 충분했다. 드라큘라는 바람과 안개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생동감을 실어주기 위한 홀로그램, 안개 연출을 위한 포그까지 다양한 장치가 사용되어 마치 사건이 일어나는 시공간에 실제로 와 있는 듯한 느낌으로 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 또한, 4중으로 회전하는 무대 세트를 수시로 움직여 장면을 전환하거나 인물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표현하는 등 단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루시와 뱀파이어의 슬레이브 세 명, 그들의 유혹에 먹잇감이 되는 대상들조차 한없이 관능적으로 표현된다. 특히 루시 역을 맡은 이예은 배우는, 드라큘라의 키스를 받기 전과 후 행동이나 목소리의 톤 차이를 확연히 구분해 보여줌으로써 마치 서로 다른 자아가 충돌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새빨간 피를 얼굴 한가득 묻힌 루시의 모습은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영생, 그리고 드라큘라의 ‘유혹’이 핵심이 되는 작품이라, 보고 나서도 한동안 뇌리에 남아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