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름 판타지아 Jan 11. 2022

지나온 감정을 부정하지 않을 용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7)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욕망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만큼,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이전작들에서 다뤘던 욕망들(소유, 후회, 결핍, 자유)보다는 고전적인 욕망이 드러나 있으며, 그 주체는 '청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 컷 ⓒ소니픽처스코리아




억눌린 욕망, 첫사랑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3년은 '보수 주의'가 미국으로부터 퍼진 시대였으며, 엘리오와 올리버 두 사람은 유대인으로, 다비드의 별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첫 만남에 이미 서로에게 감정이 생겼음에도 쉽게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말을 꺼내기까지의 교류와 고민들을 세심하게 비추는데, 사실 상황은 현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게이, 레즈비언들은 상대방의 성 정체성을 알지 못하거나, 본인이 커밍아웃 하기 전까지 감정을 억누르고 숨기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 숨 막히는 눈치싸움을 세심하게 표현한 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였던 심리묘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처한 환경은 그들이 마음을 나누기에는 너무 어렵기만 한데,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더해진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6주로 제한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 이 시간제한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엘리오가 ‘침묵을 견딜 수 없다’는 쪽지를 남긴 것을 계기로, 그들은 비로소 감정을 꺼내어 나누게 된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 컷 ⓒ소니픽처스코리아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한 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어요, 신호 좀 보내지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엘리오의 대사는 시간이 제한된 사랑 앞에서 그들이 느끼는 절박한 심정을 잘 표현한다. 같은 상황에서 이 둘이 나누는 대화는 그동안 ‘아닌 척’하며 깨알 같은 신호를 상대방에게 보내왔던 둘의 모습을 쭉 떠올리게 해주기도 한다. 엘리오는 늘 올리버를 그리워한다. 복숭아를 통해 비춰진 욕망이나, 늘 듣는 음악, 천천히 지나가는 필름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그의 추억은 엔딩까지 이어진다.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You can't step into the same river twice'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인용구가 이 영화의 테마를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엘리오가 고민을 하는 과정 중에 헤라클레이토스의 'The Cosmic Fragments'를 집어 든다. 그리고 올리버도 흐르는 강물처럼 변해야만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대사를 한다. 엘리오의 아버지가 철학교수이기에, 이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관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라는 말은 올리버가 흐르는 강물을 이야기했듯,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안정되거나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변화하는 것은 엘리오와 올리버의 감정, 그리고 상황이다. 6주라는 시간이 끝나감과 함께 서로를 향한 마음이 흐른다. 두 사람의 심리는 엔딩에서 올리버의 전화를 받을 때까지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어쩌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한 사랑의 완전한 사이클을 6주 안에 담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 컷 ⓒ소니픽처스코리아


둘의 사이를 이미 아는 펄먼 교수 또한 변화한 엘리오에게 그가 했던 사랑을 부정하지 말고 전부 기억하라고 한다. 물론 그가 다른 아버지들과 달리 아들의 동성애를 지지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더 와닿는 것은 이미 느껴버린 감정에 대한 인정이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단 한 번뿐이다'라는 인용구에서도 드러나는데, 욕망과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올리버가 결혼 소식을 전하려고 한 전화에서 "전부 기억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한 번의 사랑 경험으로 인해 두 사람은 변화했고, 이제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Call me by your name, I will call you by mine"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 컷 ⓒ소니픽처스코리아


엘리오와 올리버는 나이나 상황 때문인지 몰라도 성격이나 행동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엘리오는 사랑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소년으로, 이제 욕망에 눈을 뜨고 상대에게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기사와 공주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슬쩍 올리버에게 이 이야기를 해도 될지 떠보기도 한다. 반면 올리버는 조심스럽다. 엘리오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늘 한발 물러나는 식이다. 그의 절제하는 성격은 아침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늘 달걀을 하나만 먹는 모습에서 쉽게 알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늘 "저는 저를 잘 알아요"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통제한다. 마침내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하고 난 후에도, 엘리오가 불편하지는 않았는지, 상처받지는 않았는지 끊임없이 살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7살 차이라는 설정은 빛을 발한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 컷 ⓒ소니픽처스코리아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호명'이라는 개념은 쉽게 이해하자면 김춘수 시인의 '꽃'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인식되어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된다는 것, 이것을 사랑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나도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라는 말은 한 번 생각해 볼 만하다. 자신의 전부를 줄만큼 사랑한다는 의미인지, 나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인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이름을 여러 번 외치며 사랑을 부르는 그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아픈 법인데, 그 감정과 자신의 이름이 더해져 묘한 의미를 만들어 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용서와 복수의 굴레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