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리뷰는 미장센을 제외하고 스토리 위주로만 쓰임)
감독/각본: 나카시마 테츠야 (네 번째 작품)
장르: 로맨스, 블랙코미디, 뮤지컬
줄거리: 도쿄에서 백수 생활을 하던 쇼(에이타)는 고향의 아버지(카가와 테루유키)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행방불명 되었던 고모 마츠코(나카타니 미키)가 사체로 발견되었으니 유품을 정리하라는 것. 다 허물어져가는 아파트에서 이웃들에게 ‘혐오스런 마츠코’ 라고 불리며 살던 그녀의 물건을 정리하며 쇼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마츠코의 일생을 접하게 된다. 중학교 교사로 일하며 모든 이에게 사랑받던 마츠코에게 지난 25년간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다음 영화)
이 영화를 본 건 2020년 이후로 두 번쩨다. 그 때는 눈물이 흘렀을 정도로 깊이 벅찼고 그랬기에 쉽사리 다시 볼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 때 내가 조금 센치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공 들여진 가치 있는 영화란 의견은 여전하다.
나무위키에 이 영화 장르로 "불행 포르노"가 기재되어 있다. 인과관계와 목적이 있는 잇달은 불행의 이야기를 그렇게 칭하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면 큰 고난 없는 해피엔딩은 "행복 포르노"인 걸까? 애초에 상업영화라는 건 다 자극적으로 조립해 감정을 유발하는 게 목적인데 영화 자체가 포르노인 것일까? 어불성설 같다. (빈곤 포르노라는 문제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 얘기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있는데 그저 불행 포르노라고 치부하는 건 괴로운 감정을 유발한 데에 대한 화풀이가 아닐까.
마츠코는 경계선 성격장애(애정결핍)를 앓고 있다. 심히 변덕스러우며 불안정하다. 어릴 적부터 어린 여동생에게 관심을 뺏긴 후, 자신대로 가정에서 자리를 찾기 위해 본인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그게 마츠코의 경우 (우스운 표정으로) 아빠를 웃게하는 딸, 늘 말을 잘 듣는 착실한 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을 만족시키려 바라는 학교를 나오고 교사가 된다. 그러나 소극적이고 회피적인 성격이 작은 사태를 키워 잘리게 된 후, 그녀는 부모의 실망이나 비난에서 대피하려 집을 무작정 나와버린다. 이 때 본인을 막는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데 원망의 화살을 부모의 관심의 수혜자인 동생에게 돌려버린다.
작가 지망생인 테츠야와 연애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타인에게 받은 사랑에 완벽하게 귀속되어 폭력성마저 용납하며 그걸 토대로 연애관이 생성된다. 그렇게 수많은 남자들을 거쳐가며, 매번 버림 받고도 또 새 연애에 바보처럼 빠진다. 사랑을 받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늘 떠날것이라는 불안함이 문제이기에, 늘 위태롭다.
얼핏보면 남자를 밝히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색욕이 동기인 적은 없다. 그저 애정을 받기 위해 몸을 쓸 뿐이다. 그녀야 말로 누구보다 내면은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있다. 어떠한 남정네의 사랑이 아닌 가족의 애정과 관심, 그녀가 제일 바란 건 그러한 것이다.
그녀는 그 어디보다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운명은 매몰차게 문을 닫았고, 아빠의 죽음, 여동생의 죽음은 귀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삶의 악화의 굴레에는 죄책감이 한 몫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었던 만큼 자신을 탓했을 것이다. 다 심리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その瞬間、人生が終わったと思いました : 그 순간,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슬픈 건 그녀의 강력한 삶의 의지이다. 늘 그녀의 동기는 내적인 게 아니고 타인이 계기였으며, 공부도 미용도 곧 잘 했지만 그건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을 훌륭하게 재현해내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이랄게 평생 어떠한 역할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었으니까.
몇 번이고 마츠코는 삶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머지 않아 새로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고 붙든다. 어찌보면 가벼워 보일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삶의 의지이다. 세상에 연고 하나 없고, 죽음과 자살은 그녀를 둘러싸지만 그럼에도 끈질기게 살 이유를 찾고 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저 그녀의 습관들과 기제만이 남는다. 삶이 점점 그녀를 깎아먹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구석에서 마츠코가 여동생을 떠올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명함을 찾으러 나가는 건 유의미한 변화이다.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타인이 아닌 자신 내에서 동기를 찾았기 때문이다. 다시 또 삶에 대한 의지를, 심지어 이번에는 올곧은 의지를 쥐었지만 그 날 그녀의 삶은 뜻하지 않게 끝이 난다. 평생토록 자신의 뜻 한 번 펼치지 못한 채 그녀의 삶은 중단되어 버린다.
처음으로 내적 동기가 일은 게 정신과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이후라는 것 또한 유의미하다. 소위 한심하게 여겨지는 그녀의 성격과 바람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다. 마츠코는 어릴 적의 환경으로 인해 극도로 불안정한 사람이 되어 인생을 말아먹는 선택들만 했지만 그녀는 그녀대로 최선을 다해 삶에 임하는 것이었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살다 간 인간이었다. 아마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 마츠코 같은 사람들을 혐오하고 무시하는 대신, 이해하고 연민하자고 얘기하는 것 같다.
"何で:어째서"
"でもいい、殴られても、殺されても一人よりはまし:괜찮아, 맞아도, 죽어도 혼자인 것보단 나아"
운명은 계속해서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어째서'는 그저 우러나오는 그대로의 의문이다. 불행에 별다른 원인은 없다. 삶의 의지가 매우 강한 그녀이지만 마츠코는 죽는 것보다 혼자인 것을 더 두려워한다. 그러니 인생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평생 삶의 독립성을 갖지 못한 그녀는 계속해서 "어째서"를 물을 수 밖에 없었다.
"生まれてすみません: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가 그녀에게 이러한 말을 하게끔 이바지 했겠지만 첫 애인인 타츠야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다. 그녀는 "결국 진심으로 사랑해 준 건 테츠야 뿐"이었다며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한 폭력적이고 일그러진 사랑이 그녀에게 남긴 영향력의 깊이로 우리는 그녀가 얼마나 사랑이 결여된 상태였고 첫 경험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느낄 수 있다.
"ただいま:다녀왔어", "おかえり:어서와"
결국 그녀는 이 말을 듣기 위해 먼 길을 멀리멀리 돌아왔다. 그녀는 24살에 집을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으며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고 울었다. 이 영화에선 결국 죽음으로 나락을 벗어난 것 마냥 연출되었지만 사실은 그 나락 속에 묻힌 것처럼 보인다, 그 불행의 밑바닥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모든 게 끝난거라면 안식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류의 개과천선
그렇게 사랑을 찾아 해맨 마츠코의 해답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가족과 집이었듯, 마츠코가 지금껏 만난 애인에게 쏟은 사랑또한 진실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저 본인이 버려지지 않기 위해 병적으로 매달리고 사랑을 구걸하며 대가로 자신의 사랑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류가 마츠코를 통해 구원받는 게 어떤 이유인지 헷갈린다. 가족에서 채워지지 못한 결핍을 안고 있는 자들이 만나 서로 치유하려는 게 원래의 연인간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어떠한 사랑이던 크다면 위력을 가진다는 말을 하고 싶은걸까?
"마츠코 고모를 류는 신이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무엇 하나 똑똑하지 못했고, 철저하게 불행했던 사람에게 신이라니. 난 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생각한 적도 없다. 하지만 만약에 이 세상에 신이 있어서 고모처럼 사람들을 웃게 하고, 힘을 북돋워 주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지만 자신은 늘 너덜너덜하게 상처 입고, 고독하고, 패션 감각은 꽝이고, 그렇게 철저하게 촌스러운 사람이라면 나는 그 신을 믿어도 좋을 것 같다."
내내 감독의 견해를 쫒았지만 후반 즈음 의견이 분기되었다. 뜬금없이 기구한 이 삶을 미화하는 게 의아하다. 언제부터 마츠코가 사람들을 웃게 하고, 힘을 북돋워 주었지? 애썼고 가련하지만, 이타적인 성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흔히 창녀라고 설명될법한 그녀가 성녀의 무언가를 상기시키는 것은 나도 동의한다.
여러모로 보는 눈도 즐겁고, 스타일도 확실한 좋은 영화였다.
비록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만, 나는 무조건 한번쯤 볼만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