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들이여, 겨울 식량을 준비하라!
세번째. 현실과 결합한 몽상가들
예술인들의 모임은 플랫폼에서 놀랄 정도로 빠르게 커졌다. 몇 개의 정기 모임이 생겼고, 비정기 모임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모임을 개설하기만 하면 참여 인원은 빠르게 채워졌다. 대기 인원으로 줄 선 인원이 참여 인원보다 많은 경우도 왕왕 있었다.
모든 모임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강 가는 길목 망원동의 한 카페 겸 바에서 개최한 정기 모임 날이었다. 고즈넉한 올드 빈티지 가구 틈새로 비틀스와 핑크 플로이드부터 벤 하워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록 음악이 야마하의 고품질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모임 당일 세 명이 불참을 통보했고, 대기 인원은 참여 인원으로 자동 변경되며 급하게 출발해야 했다. 그 와중에 한 명은 한 시간 반이 늦는 바람에 정작 모임에는 참여도 못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모임은 스피커 볼륨을 고려하지 못한 실책으로, 끝날 때쯤에는 모두가 아픈 목으로 헛기침해야 했다.
모임은 다양한 주제로 열렸다. 영화 감상 후 비평하기, 전시 보러 가기, 밤하늘 별 보러 가기, 액자 만들기, 생각 없이 드로잉 해보기, 뭐라도 해보기, 술과 시의 밤 등등…. 얼핏 뜬 구름 바라보며 지적 허영심이나 채울 것 같은 제목들이지만, 예술인들은 틈틈이 서로를 알아가며 ‘작당 모의’를 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초반의 잔 실수들을 보완해 가며 모임은 조금씩 자리 잡아갔다.
‘뭐라도 해 보는’ 정기 모임이 열리는 날이었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진 이 모임에서 눈에 띄는 예술인이 몇 있었다. VFX 아티스트는 그동안 구상만 했던 SF 소설을 마침내 써 내려갔다. 3D 디자이너는 한복을 디자인해 전시할 꿈을 꿨고, 이에 자극받은 전시 기획자는 마침내 오래 품은 에세이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밖에 다양한 예술인들이 전공과 관련된, 혹은 관련 없는, 하지만 늘 하고 싶었던 것을 주 1회라는 강제성에 기대 조금씩 실현해 갔다.
이날은 정기 모임 이후에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펀딩 모임’이 다른 장소에서 열렸다. 정기 모임이 끝날 때쯤, 일러스트레이터가 이 모임에 간다고 하자 세 명이 즉흥적으로 따라나섰다. 사진작가의 차를 빌려 타고 남가좌동 빈티지 소품을 모아 놓은 ‘지하 창고’로 향했다. 갑자기 네 명이 우르르 지하 창고로 들어오니 펀딩 모임의 주최자도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어쩌겠는가. 즉흥성도 예술인들 모임의 묘미라고 면피를 씌워볼 수밖에. 하하하 멋쩍게 웃으며 죄송한 마음과 반가운 마음의 시그널을 송출할 수밖에.
미리 와 있던 3D 디자이너와 영화 제작자, 영화 미술가, 주최자인 의류 사업가에 더해 우리 쪽의 사진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책 쓰는 작가, 그리고 나까지 총 여덟 명이 한기가 도는 창고에 자리 잡았다. 무임 주최자와 영화 제작자는 모두 펀딩 성공 경험이 있었다. 사진작가에게는 펀딩 플랫폼이 먼저 기획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3D 디자이너는 플리마켓도 운영하며 미니 앨범, 향 오브제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판매한 적 있는 전천후며 일러스트레이터는 다수의 북페어 경력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 어떤 아이템을 팔 것인지, 어떤 식으로 소개할 것인지, 때로는 냉철한 판단도 해주고 경쟁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대화가 ‘인공지능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주제로 자꾸 빨려 들어갈 때마다, 영차 끄집어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다’로 얼른 결론짓고 실용적 논의로 나아갔다.
3D 디자이너는 새하얀 산과 수국 모양의 석고 오브제에 향수를 한 방울 떨어트려 방향제로 활용할 수 있는 제품을 준비 중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일러스트 북을 작은 크기와 적은 분량의 책자로 만들고, 책갈피와 스티커 등의 리워드를 준비했다. 나는 두 번째 소설책의 소개 문구를 다듬었고, '행동을 디자인한다'는 모임장은 액션캠 이용자를 위한 파우치의 실물 샘플을 공유했다.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고 인맥과 인프라는 공유했다. 그러자 막연함의 안개가 조금씩 걷혀갔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지방의 폐교 위기 학교를 찾아가는 예술인들의 이벤트 기획까지 하기에 이른다.
펀딩 모임도 정기적으로 개최하자는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들을 담기에 단발성 모임으로는 어림없어 보였다.
모임이 끝날 때쯤에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이렇게 실용적일 수 있다니!
예술인들의 모임은 뜬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구름을 포섭할 수 있을지 작전을 짜는 단계로 나아갔다. 누가 알겠는가. 이러다 정말 예쁜 구름 하나 근두운처럼 타고 다닐 수 있을지.
예술인들의 자조 섞인 농담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마감과 후원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나 뭐라나….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인공지능시대든, 혹은 더 험악한 빙하기든, 예술인들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버티고, 발버둥 칠 것이다. 서로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눠주면 웬만한 한파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동굴에서 깨죽이고 발발거리고 뒹굴뒹굴하다 번뜩 우다다 머리 벅벅 긁는 나날 끝에 기어코 만들어낸. 우리의 예술을 동굴 밖으로 꺼내 올 때가 됐다.
그러니, 동맹군이여 부끄러워말고 모습을 드러내자!
겨울 식량은 동굴 밖에 가득 있나니!
*매주 참여하는 예술인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얼마전부터 상업적으로 살기로 결심한 3D 영상 디자이너.
3D 영상 디자이너 강겨울의 인스타그램 : @i.an________
Behance 페이지 : https://www.behance.net/hiems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