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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킬러 Feb 25. 2019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아가기 위해 산다

위화 <인생>(원제:活着)


집안의 / 전 재산을 // 도박으로 / 다 날려서 //
아버지 / 몸져눕다 // 저세상에 / 먼저 가고 //
전쟁 후 / 돌아오니 // 어미마저 / 세상 떴네 //

귀하디 / 귀한 아들 // 피를 뽑다 / 저승 가고 //
착하디 / 착한 딸은 // 애를 낳다 / 명줄 놓고 //
자식들 / 먼저 보낸 // 아내마저 / 먼저 갔네 //

핏덩이 / 남겨놓고 // 사위 놈도 / 가버리고 //
마지막 / 남은 핏줄 // 손자마저 / 잃고 나서 //
외로이 / 혼자 남아 // 늙은 소와 / 살아가네 //

                    - 푸구이에게 헌정하는 자작 연시조




부끄럽게도 벌써 12년이 넘는 중국 생활을 하면서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중국어를 쓰며 살았지 중국어로 된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도전해봤다. 중국어로 된 원문 소설 읽기! 


소를 부려 밭을 갈던 노인 푸구이가 들려주는 자신의 살아온 여정은, 소싯적 노름때문에 가산을 탕진하는 것으로 시작해 읽는 내내 한숨이 절로 나오게 하는 것이 박복함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먼저 돌아가신 건 기본에 자식과 부인, 심지어 사위와 외손자까지 모두 먼저 보내고 베갯잇에 자기 장례 치를 돈을 넣어 놓고 살아가는 노인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작가들이 전쟁, 문화혁명과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고된 삶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 작가 위화는 주인공 푸구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말해 주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이 책 <인생>은 처음으로 읽는 첫 중국어 원문 소설로도 탁월한 선택이었고, 작가가 이거 주인공에게 해도 너무 하는거 아니냐 하면서도 책을 놓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시적인 표현이나 지나치게 상세한 묘사가 대부분이었다면 내 중국어 실력으로는 어쩌면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는데, 이 책의 문장들은 가끔 아파트 단지 내에서 마주치는 아들 친구네 할머니, 할아버지과 잠깐씩 수다떨 때처럼, 푸구이 할아버지 옆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기아로 인한 사망자수나 연평균 국민소득을 보는 것보다 그 옛날 어려울 적엔 여덟 식구가 바지 한 벌로 돌아가며 입어서 한 번에 한 명씩 밖에 외출을 못했다는 이야기로 더 가난을 가깝게 실감할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입을 통해 펼쳐진 이야기들로 그 시절 그들의 삶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런데, 과연 푸구이의 삶이 그저 신산하기만 한 것이었을까? 그에겐 노름으로 재산을 다 날리고 농사일을 하는 아들에게 "가난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 사람은 그저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말하는 어머니가 있었고, 기생과 놀아나고 노름판에서 집에 돌아가자고 설득하러 간(그것도 임신까지 한) 자신을 때려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한 아내가 있었으며, 농사와 집안 일을 돕고 결혼하고도 부모를 챙기는 엽렵한 딸과 아끼는 양을 위해 매일 풀을 베어다 먹이는 맘씨 예쁜 아들이 있었다. 게다가 그의 노름빚을 받아 부자가 된 룽얼이 악질지주로 몰려 총살되기 직전에 "내가 니 대신 죽는구나"라고 하는 부분에선 만약 푸구이에게 여전히 재산이 남아 있었다면 과연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사람은 다른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작가의 서문과 '이 모든 게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하는 푸구이의 말에는 약간의 반감을 숨기지 않던 내가, 죽기 전 아내 자전이 푸구이에게 하는 말에는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자기한테 잘 해 줘서 참 고맙다고, 당신한테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아주고 그애들이 살아생전 효도했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이 정도면 만족한다고(원문에서는 知足라고 표현됨), 다음 생에도 같이 살자고, 그리고 당신은 계속 열심히 살아가라고...  불행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에서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녀가 오히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큰 불행을 견뎌낼 수 있는 삶의 태도 중에서 '만족'보다 더 현명한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문득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건 만족함을 아는 '지족(知足)'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는 경쟁이 치열한 이 세상에서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고, 배가 부르고 부족한 게 없으니까 하는 소리 아니냐고. 푸구이 부친의 말처럼 닭이 거위가 되고, 거위가 양이 되고, 그 양이 또 소가 되려면 만족하고 살아서 뭐가 되겠느냐고, 발전이 있겠느냐고. 그러면 나도 묻고 싶다. 나보다 항상 더 높은 것을 보며 끊임없이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삶은 행복하냐고, 그 삶을 위해 내가 가진 더 소중한 것을 잃고 살아도 괜찮겠느냐고. 

소를 끌고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멀어져가는 푸구이의 모습을 읽으며, 미국 민요 '올드 블랙 조'를 듣고 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중문판 작가의 서문이 생각났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대사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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