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 <강조해야 할 것>
수전 손택의 글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무료할 때 여유로이 가볍게 볼 책으로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다. 그녀의 다른 책이 아닌 <다시 태어나다>를 먼저 선택한 것도 내게 워밍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두번째 책으로 이 책 <강조해야 할 것>이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내가 본 것들(Seeing), 내가 읽은 것들(Reading), 그곳과 이곳(There and Here)으로 나뉜 책의 구성이 일목요연해서다. 내가 쓰고 있는 블로그의 보다, 읽다, 가다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눈 것과 통하는 면이 있어서 반갑기도 했다.
내가 본 것들(Seeing)
예술의 전방위적인 비평을 했던 손택이 본 파스빈더의 영화부터 현대무용, 바그너의 오페라와 사진들까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예술들이 언급되어 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사진에 대한 비평에 막힘이 없었던 그녀가 자신이 사진에 찍히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해했다는 것이다. 나도 같은 종류의 사람인지라 그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는데 그녀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강한 관찰자라서 관찰되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인지, 가식적이거나 포즈를 취하는 것에 대해 청교도적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지.
내가 읽은 것들(Reading)
시인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브로드스키,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인 제발트와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과 돈키호테에 관한 글까지, 일기 속 읽는 것에 항상 집착했던 그녀답게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성욕에 관해 씌어진 가장 활기차고도 직설적인 책이라고 소개한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는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그곳과 이곳 (There and Here)
여행을 할 때에는 거의 글을 쓰지 못해서 글을 쓰려면 한 곳에 머물러야만 했다는 그녀. 그녀 안에 있는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작품에 사로잡힌, 야망에 가득 찬 성가신 작가가 작업을 할 수 있게 동행하고 보살피는 일을 처리할 뿐이라고 했던 그녀의 "읽기와 쓰기"에 대한 명쾌한 정의가 머릿속에 콕 박힌다.
읽기는 쓰기에 앞선다.
그리고 읽기로 인해
쓰고자 하는 욕망이 촉발된다.
읽기는, 읽기에 대한 사랑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게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읽거나
과거에 자신이 좋아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멋진 기분 전환이 된다.
기분전환, 위안, 고통, 그리고...
그렇다. 영감이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특이한 열정과 주의력으로
독서의 기술을 연습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쓴 것을 읽어보기 위해서 쓴다.
그리고 쓴 것이 괜찮은지 본 다음,
물론 결코 괜찮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쓴다.
읽을 만한 뭔가가 되기까지
몇 번이고 다시 쓴다.
당신은 당신 글의 최초의,
그리고 가장 엄격한 독자이다.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음을 인정하게 됐다. 내가 쓴 글을 읽어 보고, 다시 쓰고, 또 다시 쓰며 그 욕심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임을 실감한다. 그녀처럼 강렬한 어휘의 선택과 쾌활한 문장의 리듬으로 강조해야 할 것을 강조할 줄 아는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