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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킬러 Jun 24. 2020

끝까지, 계속해서, 열심히 뛰어야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승리보다 소중한 것>

가끔 어떤 책은 읽은 지 한참 지나 그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면, 작가가 강조한 주제보다는 지나가듯 언급했던 소소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더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하루키가 호주까지 날아가 직접 보고 느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관전기'였던 이 책도 그런 책 중 한 권이다.


<승리보다 소중한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하루키가 설명했던 호주의 상어 이야기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상어에게 인간을 먹는 습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인간을 공격하는 사고가 일어나는 건, 상어의 시력이 아주 나빠서 한 입 먹어보지 않고는 상대방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웨트 슈트를 입고 있는 서퍼들을 돌고래인 줄 알고 공격한다는데, 상어가 '어라, 먹어보니 돌고래가 아니네'하고 놓아주더라도 이미 사람에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영화<죠스>를 본 이후로 바닷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내 물놀이 원칙이 옳다는 것을 그때 다시 한번 확인했었다.(영화감독 데이빗 핀처도 나랑 똑같은 이유로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다)

  

솔직히 올림픽에 그리 열광하는 스포츠 팬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별일 없이 진행되던 국제적인 행사가 미뤄진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이제서야 한국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에 흥분하며 큰 소리로 응원하던 그 순간들이 썩 즐거웠던 한때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와 함께 지난 올림픽도 구경하고 '승리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다시 확인할 겸 오래전 친구에게 받았던 이 책을 다시 찾아 읽었다. 


그가 먹은 삼시 세끼의 메뉴와 가격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올림픽의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까지 하루키가 23일 동안 시드니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담겨 있다. 특히 최종 성화주자였던 호주 원주민 출신 선수 캐시 프리먼이 여자 육상 4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읽었을 땐 그때의 감동이 떠올라 뭉클했다. 핍박받던 원주민의 일원이었던 그녀가 얻게 된 승리가 국가의 화합이라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이었겠지만, 그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3년 후 선수 생활을 은퇴했고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카메룬의 축구 우승, 실수에도 웃으면서 유쾌한 경기를 펼치는 투포환 경기, 한국 대 일본의 야구 경기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책이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의 두 마라토너 아리모리 유코와 이누부시에 대한 글로 시작된 책은 마지막에 다시 그 두 사람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하루키는 당시 여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다카하시 나오코가 아니라, 여자 마라톤에 선수로 뛰지 못한 아리모리 유코와 남자 마라톤에서 탈수 증상으로 중도 포기한 이누부시를 인터뷰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승리를 사랑한다. 승리를 평가한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 이상으로 '깊이'를 사랑하고 평가한다. 때론 인간은 승리하고, 때로 패배를 맞본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여전히 마라톤 같은 인생을 뛰고 있는 중이다. 비록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결승점에 도착할 그때까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계속해서, 열심히 뛰어야겠다!



붙임 : 2015년 원래 제목을 그대로 살린 <시드니!>라는 책으로 다시 출간됐다. 번역도 다시 하고 100여 컷의 일러스트까지 수록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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