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의 씨 자도 모르는 취준생이 영화과에 들어가게 된 이유 (3)
그 때 영화가 내 주위를 밝히니
무언가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그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황폐해진 영혼을 붙잡은 채로 처음 했던 일은 취업준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나이가 스물 중반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시민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이라 장담하며 살았기에 이뤄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변변한 자격증도 하나 없었고 학점은 겨우 겨우 3점이 넘었다. 그런 스펙으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었다. 영어 학원을 다니고 스터디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소서를 썼다. 자소서를 쓸 때 제일 힘든 질문은 ‘지원 동기’ 였다. 지원 동기라고요? 저는 그냥 돈이 필요하고, 이 회사에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쓰고 싶은 마음을 백 번쯤 죽여 가면서, 반드시 이 회사에 입사하고 싶은 내 마음을 흉내내어 글을 썼다. 간간이 서류 전형에 통과해서 면접을 본 적도 있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낙방이었다.
그 시절은 3n년 인생 중에 단연코 가장 불행했던 시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낮았던 자존감은, 누군가의 평가 앞에 계속해서 자신을 내던져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쪼그라 들었다. 매일같이 눈물이 났다. 인간이 태어난 데에는 아무런 목적 같은 것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위해 기여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나의 쓸모를 발견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괴로웠다.
그리고 내 인생의 가장 불행했던 이 시기에 영화를 다시 만났다.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살아오면서 영화를 그리 많이 보지 못 했다. 극장에 걸려 있던, 이른바 ‘상업 영화’들을 보면서 나는 좀처럼 이입하지 못 했다. 당시 인기 있던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는 주로 어두운 밤거리와 검사실, 그리고 경찰서 등이었다. 내 인생과는 백만 보쯤 떨어져 있는 이야기를 보면서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 했다. 취향이 아니었다, 라고 지금은 평가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살던 내게 씨네필 친구가 생겼다. 친구가 처음 보여줬던 영화는 <헤드윅>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 영화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사회에서 비주류로 여겨지는 헤드윅의 모습이 내게는 검사와 경찰들의 삶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 헤드윅의 삶은 고통스러워 보였으나, 노래할 때 그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영화에 나온 노래들과 헤드윅의 얼굴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그 때부터 ‘독립 영화’ 혹은 ‘예술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홍상수와 다케시, 에드워드 양과 이창동, 장이머우와 미카엘 하네케, 왕가위, 고레에다 히로카즈, 켄 로치,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 웨스 앤더슨과 자비에 돌란과 같은 이름들을 그 때 알게 되었고, 그들의 영화를 가슴 속에 소중하게 품었다. 나는 영화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수없이 넓은 영화의 세계 속에서 아주 소수의 영화만을 접해보고 지레 겁먹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 내 취향의 영화가 이렇게나 많았는데. 조금 더 일찍 영화를 좋아했더라면!
어느 날에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델타 보이즈>라는 영화를 보러 혼자 극장엘 갔다. 영화가 한참 인기 있었던 시기로부터 일 년 뒤에 앵콜 느낌으로 하는 재상영이어서,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때를 놓치면 영화를 볼 기회가 잘 없으니까. 독립 영화는 대체로 그러했다. 영화제나, 간혹 있는 상영회를 놓치면 좀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이 영화를 보고 말겠다는 나와 같은 신입 관객이나, n차 관람을 위해 온 팬들로 극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델타 보이즈>는 거의 원 씬 원 테이크 느낌으로 구성된 영화였다. 바꿔 말하면, 카메라는 거의 고정된 상태로 그 앞에서 배우들의 동선만 겨우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과 나는 배우들의 대사 하나 하나에 함께 울고 웃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영화는 소위 ‘밑바닥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네 명의 인물이
남성 4중창 대회에 참가하는 과정을 담았다.
공장에서 알바를 하는 일록과, 시카고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일록 옆에 붙어 사는 예건, 그리고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대용과 트럭에서 도넛을 파는 준세까지. 네 명의 인물은 각각의 이유로 4중창 대회에 참여하게 되지만 결국 영화는 노래 대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합을 맞춰보는 장면에서 끝난다. 애초에 대회에서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삶에서 노래를 놓지 않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게 영화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대용’이란 캐릭터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대용은 전국노래자랑 예선만 여러 번 도전했으나 한 번도 예선을 통과한 적이 없는, 말하자면 노래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대용은 포기하지 않는다. 또다시 전국노래자랑 예선에 도전하고, 4중창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기꺼이 생선 가게를 뒤로 하고 연습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런 대용의 모습이 바보 같아서 처음엔 웃었다.
영화 중반 이후에 대용은 친구를 앞에 두고 긴 고백을 한다.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한 번도 그 꿈을 사람들에게 말해본 적이 없다고. 못 생기고 노래도 못 하는 자신이 가수가 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비웃을까봐 두려워서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고. 그런데 어느날 TV에서 김병지 선수가 축구를 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멋있게 해내는 김병지 선수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대용은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단다. 그래서 대용은 계속해서 예선에 떨어지더라도 끝내 다시 노래대회에 도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대용의 고백을 롱테이크로 담은 영화를 보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났다. 숨기고 싶은 약점을 들킨 기분이 들었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고, 뒤늦게 영화라는 세계를 알게 되면서 나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쭉 해왔다. 하지만 영화를 잘 알지도 못 하고, 별다른 재능도 없는 내가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웃을까 두려웠다.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 뒤에는 언제나 ‘네까짓 게 무슨 영화야?’ 라는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대용을 보라! 떨어질 걸 알면서도 바보같이 도전하는 대용의 모습은 누구보다 멋있었다. 그까짓 남의 시선이 뭣이 중헌디. 중요한 건 난데.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이 소중한 삶을 타인의 시선 따위를 걱정하며 낭비할 수는 없었다.
긴 긴 글 끝에
그래서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기나긴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끌 수 없는 불이 붙게 된 건 물론 <델타 보이즈>를 봤던 그 날 때문이다. (고봉수 감독님 보고 계신가요.)
사실은 지금도 두렵다. 변변치 않은 내 재능이 두렵고, 생계를 이어가는 데에 끝없이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두렵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언젠가 영화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 두렵다. 제일 두려운 건 내가 써내는 글과 내가 만드는 영화가 그 누구의 마음에도 닿지 못하는 것이다. 핏덩이 같은 내 작품이 하품 나오는 망작이라면 그 사실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생각만 해도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대용을 떠올린다. 노래를 전혀 못 하는 음치면서, 끊임없이 노래자랑대회에 도전하는 대용을. 대용의 마음을. 대용의 용기를.
그러니까 일단은 계속 한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게 지금 나의 신념이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