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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주 Nov 03. 2021

영화와 영화 읽기, 그리고 소통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영화를 읽다


영화를 본다, 영화를 해석한다, 영화를 분석한다 등등 영화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다양한 표현이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영화를 '읽다'라는 말을 줄곧 사용해 왔다.

영화를 읽는다고 말하는 것이 영화를 바라보는 모든 방식을 포괄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자, 영화가 가진 텍스트성을 고려한 단어 선택쯤으로 여겼기 때문에 입에 붙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그 ‘읽는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물론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 내가 처음은 아니겠지만, '읽는다'는 표현을 마음에 새기면서 조금 더 영화의 총체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개인적인 심리적 추진력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를 읽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읽다’라는 말을 단지 글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읽다'라는 말은 그 대상이 사람의 마음이 될 때도 있고, 그림이 될 때도 있고, 게임의 수를 읽을 때 사용될 수도 있다.

다시 써 보자면 ‘통찰하다’, ‘꿰뚫다’ 정도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모든 외연을 꿰뚫어 보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렇게 모든 외연을 꿰뚫고 나서 뚫어놓은 구멍을 천천히 빠져나오면 그제야 영화의 총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만 어렴풋이 느끼던 그 총체로써의 영화를 의식적이고 분명한 하나의 사유 이미지로 불러내는 과정이라고 하고 싶다.


영화의 외연이라고 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프레이밍, 사운드, 연기, 편집, 내러티브 등등 영화가 가진 모든 외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영화의 외연들을 자신의 감상에 맞게 끌어들여 독자적인 내면화를 이루어내고 그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이 감상에서 끝나든 특정한 형태의 표현으로 이어지든 간에 어쨌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영화 읽기를 수행한 것이며 그렇게 우리 스스로 재조립한 영화는 어떤 정제된 사고 형태로 우리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처럼 남게 된다.

이것이 영화 읽기이며 앞에서 말한 사유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일 것이다.

그런데 감상에서 그치는 것을 넘어 어떠한 표현이 이루어진다면 그 사유 이미지가 훨씬 더 분명하게 형성될 것이다.

또한 표현된 이미지의 조각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분명하게 꺼내졌기 때문에 그 형태가 명확히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거나 소통하며 조각을 건네주기도 하고 다른 조각을 건네받기도 하면서 또 다른 그림을 그려 나갈 수도 있게 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표현과 소통 또한 영화 읽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총체의 결여


그러나 영화를 읽어내려 시도하면 할수록 그 총체에는 가까워지지 않는 느낌이 든다.

감상을 시도하다 보면 독법이 치우칠 때도 있고, 내 조각이 전체 그림인 양 여겨지는 오만함에 빠지기도 하고, 가끔은 다른 사람의 조각이 너무 폐쇄적이라 다른 조각과 어울리지 않을 때도 있고 내 조각이 그럴 때도 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점 영화의 총체에 대한 어렴풋한 의식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영화를 읽어내는 시선이 어느 한쪽에 갇혀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르게 바라보면 영화의 모든 외연들의 조화가 우리의 무의식에 전달해주는 총체적인 감상을 전부 의식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총체적인 영화 읽기는 태초부터 한계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느 한쪽에 갇혀있다고 해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영화 읽기', '총체로써의 영화'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곳을 향하는 이상주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기도 했다.


많은 경우 내가 영화를 읽을 때 어느 정도 완성된 사유로 뻗어나가는 것은 대부분 영화의 텍스트 즉, 내러티브였다.

내러티브 구조와 상징, 캐릭터 묘사와 이야기의 메시지, 거기에 뒤따르는 사회, 문화적 요소들까지 사유가 뻗어가면 뻗어갈수록 영화의 형식보다는 내용적인 측면으로 치우쳐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독법은 영화를 읽어내는데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어쩌면 내가 경시했다고 여긴 그 모든 영화의 형식들은 핵심적인 내용 요소들을 보조해주는 기능적인 역할을 위해 사용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고, 단순히 미적이고 조형적인 이유에서 채택된 아이디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실마리가 그곳에 온전히 존재하지는 않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내용적인 독법은 문학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고, 문학만이 아니라 다른 예술형식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는 애초에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다른 예술형식들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다른 예술형식의 독법을 활용해 영화의 독법을 고안해 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점이 나로 하여금 내 어렴풋한 믿음을 면밀히 살펴보고자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고, 이 때문에 일정 시간 영화와 멀어지는 시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것이 도움이 됐던 걸까, 어느 순간 영화가 영화 자체로써 느껴지는 것 같은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는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놓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총체로써의 영화에 대한 실마리를 나름대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겼고 희미하기만 했던 감정들이 구체적인 사유의 모양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것은 개별 영화를 읽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형식과 구별되는 영화만의 특징 혹은 장점을 면밀히 살펴 영화라는 총체에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었다.


왜 영화여야만 하는가


덕분에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영화에 대한 깊은 의심과 물음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질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왜 영화여야만 하는가?'였다.

왜 이 모든 내용들이 영화라는 형식으로 나타나야만 했을까 하는 당위성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인물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장면을 '인물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시퀀스'라고 표현하고 '그것이 영화에서 인물의 어떠한 변화를 나타내는 장면이며 이 장면으로 하여금 감독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혹은 '이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느낌이 들게끔 만든다.' 정도의 표현으로 정리한다고 했을 때, 이러한 표현은 어떠한 영화적 생략이 작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 속에는 수많은 컷의 분절(물론 원테이크로 촬영될 수도 있다), 카메라의 동선, 배우의 연기 등등 '피아노 연주'라는 모티브를 지탱하는 수많은 영화적 요소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의 총합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특별한 영화적 경험을 단지 모티브 하나로만 표현하는 것은 영화적인 것들을 전부 담아내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모든 요소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어떤 작용을 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경험을 만들어 주는지, 혹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나 메시지를 어떻게 강조하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높이와 어떤 조명, 어떤 심도의 숏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특정한 의미라든가 특정한 감정선이라든가 혹은 그것이 전체 이야기 혹은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관객으로 하여금 어떻게 느끼도록 만드는가와 같은 영화의 연출이 발견되는 지점들을 최대한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모든 연출을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다.

더욱이 표현적이고 양식적인 영화가 아닌 내러티브 중심의 영화라면 영화적 요소들이 그 장면의 모티브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구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담론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한 위에서 말한 모티브 중심의 독법은 영화 읽기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이러한 연출적 총체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애초에 영화적 경험이나 아름다움은 이런 무의식적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당위적이고 도식적인 이런 접근은 영화 감상의 신비로운 측면을 지나치게 간과한 접근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우연이 작용하고, 영화라는 것은 끊임없는 타협과 포기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영화의 '필연적인 느슨함' 또한 이런 관점을 거부하는 하나의 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라는 매체만이 가질 수 있는 그 가능성은 아직도 수면 아래 많은 부분이 잠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수면 위로 꺼내 놓고 싶은 약간은 무모한 포부인 것이다.

또한 아직은, 이것으로써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고 영화를 좀 더 영화답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이 마련되고, 이런 과정을 공유하면서 영화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은 형식주의로의 경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추상적인 독법을 경계하는 동시에 영화가 가진 느슨함과 우연성을 수용하고 포괄하려는 끊임없는 노력 또한 분명히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한 마디로 정리해보자면 영화에 대한 내 개인적 감상을 최대한 영화적인 방식으로 분석해 보려는 시도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라는 질문 하나가 이 모든 장광설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렇게까지 영화를 바라보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무슨 의미를 지니겠냐는 것이다.



소통으로써의 영화


영화란 본질적으로 소통을 전제하는 예술형식이다.

물론 산업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모든 예술이 집단성을 가지고 수용자에 많은 부분을 종속시키고 있지만 영화만큼이나 사회성이 유별난 예술형식은 그다지 많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관객이 없으면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물론 오페라나 연극과 같은 공연예술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영화가 그들과 구별되는 점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바와 같이 그 모든 관객들에게 복제된 것으로써 전달된다는 점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만큼 많은 불특정 다수의 관객을 전제로 한 예술형식은 오늘날에 와서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TV 드라마와 같은 방송매체와의 비교는 굳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영화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모든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 그 영화의 원본과 복제본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사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소통에 특화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가끔은 일방적인 소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영화가 무언가를 전달하면 개인은 그(일방적일지도 모르는) 소통을 통해 개인의 내면화를 이루고 그 내면화가 불특정 다수에게서 일어나고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각자의 사유가 공유되면 사회적인 담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담론의 시선은 다시 영화로 향해 영화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그를 통한 소통이 또다시 개인에게 전해진다.

일방적인 소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돌고 도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하는 이야기가 모두 사회적인 담론을 담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영화가 어떤 담론을 펼치든 간에 그것은 소통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먼저 전달자로써의 기능을 수행하는 영화면 충분한 것이다.


또한 영화는 그 소통의 창구를 무한히 가지고 있다.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영화의 편집이 가지는 인지적 조작의 가능성, 영화의 특정한 리듬감이 가져다주는 감정적 격동, 이미지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특별한 인상 등등 그 영화의 모든 외연들이 수행할 수 있는 소통의 기능은 무궁무진하다.

영화가 가진 모든 형식적, 내용적 요소들이 전부다 소통의 창구로써 작용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요소이든 간에 우리가 그것을 통해 느끼는 감정 또한 소통이고, 쇼트 하나에서 느껴지는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어떤 인지적 작용 또한 소통인 셈이다.


이러한 소통은 분명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의 경로를 확장시켜주고 그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배가 될 것이다.

만약 감상하는 영화가 아주 다양한 소통의 창구를 가지고 있고 그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영화라면 분명히 영화를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아름다움과 그 총체가 전달해주는 감정적인 변화 혹은 이야기의 울림, 지극히 미학적인 경험 등 영화가 가져다줄 수 있는 예술적 경험의 폭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영화 속 소통을 발견하는 것은 필히 창작자와 감상자의 적극적 참여를 요하는 유토피아적인 가능성일 것이다.

만약 창작자가 다층적인 영화를 구성해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감상자가 적극적으로 영화를 읽더라도 한계가 분명할 것이고, 반대로 아무리 다층적인 작품이어도 감상자가 읽어내지 않거나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반대로 창작자와 감상자 모두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이 동반한다면 그 소통에서 가능성이 발견되고, 그렇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영화라는 매체의 발전까지도 이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영화적 소통은 단박에 이루어지기 힘들다.

특히나 지속적으로 내러티브와 리얼리티를 읽어내는데 익숙해져 있는 관객들은 영화 언어라는 감각 자체가 익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역할 또한 중요해진다.

현재 영화 산업의 흐름은 지나친 대중영화로의 경도도 있지만 동시에 영화를 깊게 읽어보려 하는 시도 또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영화 평론이 대중화되고 영화적 담화의 장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읽기의 장으로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는 것은 전문가들이다.

관객들이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전문가들이 영화와 소통하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주기만 한다면 영화적 소통의 확장은 자연스러운 물결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소통하는 사회


하지만 이런 유토피아적인 영화에 대한 기대는 역사적으로 이미 존재해왔던 것이고, 시대의 흐름은 어쩌면 그것에 반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중영화 속 사유의 탈락, 취향의 획일화, 지나치게 내러티브적이고 메시지 주의적인 독법으로의 회귀, 자아도취적 평론 등등 여러 가지 폐쇄적 요소들의 영향 아래에서 다양한 영화적 소통의 가능성이 점점 흐려져 가는 것만 같다.

또한 대중영화와 예술영화라는 이름으로 영화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그들이 스스로의 울타리를 공고하게 만들며 화해의 가능성을 점점 차단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의 흐름과도 동떨어지지 않은 듯한데, 점점 자신의 영역과 주관에 갇히는 폐쇄적인 혐오의 온상이 넓어지고 있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결국 사회적 흐름에서 노선을 틀고 싶은 것이다.


영화가 가진 가능성은 영화라는 매체가 살아 있는 한 영원한 것이고, 이러한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영화적 소통의 폭이 넓어진다면 그것은 분명 이토록 유별난 영화의 사회성 덕분에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흐름에도 그 소통의 가능성을 부여해 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은 소통하는 사회로 변화하기 위한 초석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예술에서 사회의 변혁을 찾는다는 것이 지나치게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들릴 수도 있고 터무니없는 가능성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이 유별난 영화의 사회성은 그 기능이 극대화되었을 때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사회적 힘에 대해서 어떠한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영화만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철저히 영화적 관점에서 서술했지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가짐인 것이다.

영화뿐만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소통 지향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 그것이 변화의 초석이라 말하고 싶다.

다만 앞에서 서술한 영화가 가진 그 유별난 사회성이 그것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을 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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