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5일 작성한 글 입니다.
<관람을 하지 않으신 분들은 관람 후에 읽어주시는 편이 좋습니다>
영화가 개봉한 2018년 첫 관람에는 영화가 가진 컬트적 세계관에서 오는 신선한 충격에 매료되기도 했고 워낙 벌벌 떨면서 보았기 때문에 영화를 매우 좁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 아쉬움에 재관람의 의욕이 샘솟았지만 첫 관람의 인장이 너무 강력하게 남아 영화를 본 후 겪게 될 일종의 탈진이 두려워 쉽게 2회차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던 도중, 영화 <랑종> 개봉 기념으로 약 3년 만에 재회하게 되었다.
첫 번째 관람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영화가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집에서 보기도 했고 관람환경이 극장과는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에서 공포보다는 무기력함이 더욱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컬트적인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 시퀀스들에 더욱 눈길이 갔고 그 과정에서 이 영화가 이룩한 장르영화로써의 성취만이 아닌 그것을 현실과 얼마나 탁월하게 연관시켰는지를 바라볼 수 있었다.
영화가 숏을 연결하는 방식, 인물과 세계를 연결하는 방식, 정보를 드러내는 양과 속도의 조절 방식 등을 통해 장르적인 쾌감과 동시에 현실에 대한 은유까지도 불러일으키며 그 스스로가 하나의 유기체로써 도약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력하게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던 만큼 최대한 리뷰를 실증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해보았다.
<유전>은 기본적으로 운명론적 세계관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첫 쇼트에서부터 꽤나 명확하게 제시하는데, 창을 통해 오두막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출발해 오른쪽으로 천천히 팬(pan) 하면 집을 형상화한 미니어처가 나타나고 그 미니어처를 향해 카메라가 줌인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줌인된 미니어처에서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며 미니어처가 곧 극 중 세계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영화는 시작부터 극 중 세계, 즉 관객이 그들의 현실과 동일시하고 연관시킬 수 있는 세계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직조된 폐쇄된 공간임을 암시한다.
또한 오두막을 향한 시선이 바로 피터의 방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미 결말에 대한 암시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미니어처를 직조한 것은 누구이고 시선의 주체는 누구인가?
영화의 흐름 상 애니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이는 추후에 다시 언급하는 편이 좋을 것 같기에 우선은 그 의문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정도로만 그치겠다.
첫 쇼트뿐만 아니라 장례식에서 돌아온 후 거실의 롱숏이라든지 애니가 찰리에게 파티에 오빠와 함께 갔다 올 것을 이야기하는 롱숏이라든지 지속적으로 '미니어처적 시점'으로 집 안을 바라보며 그러한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 운명론적 세계 자체가 비극임을 암시하고 있다.
피터가 학교 수업을 듣는 시퀀스에서 수업의 주제는 '소포클레스의 비극과 헤라클레스'이다.
그러나 피터는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못 한 채 멍 때리며 앞자리에 앉은 여학우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해 다른 친구와 수업 끝나고 마리화나를 빨 것을 이야기하는 은밀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그 와중에 진행되는 수업에서는 '헤라클레스의 오만함', '필연적인 비극'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헤라클레스가 극 내내 주어진 비극의 전조를 무시한 오만함이 그에게 비극을 가져다주었고, 그 비극이 필연적인 비극이라면 극 중 인물들은 어떠한 희망도 없는 그저 체스판의 말 같은 존재라는 이야기가 오간다.
그리고 논의 한가운데에 선생님이 피터에게 질문을 하고 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피터의 모습을 두면서 비극에 대한 전조를 무시하고 자신이 비극 속에 있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피터에게 그대로 투영한다.
시퀀스의 말미에서 '체스판의 말' 대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프레임은 피터를 중앙에 두고 전체적인 학생들의 배치를 보여주는데, 네모난 책상에 학생들이 각각 한 명씩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 마치 체스판에 말이 올라가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 대사를 읊는 학생의 모습은 제시되지 않고 철저히 프레임 밖에서 대사가 들리는 것은 그것이 내레이션처럼 들리게끔 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전지적 작가의 대사처럼 들린다는 점에서 이러한 프레이밍은 결국 피터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학생들 모두를 결국 운명론적 비극 아래에 있는 체스판의 말과 같은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레이션의 주체는 여전히 그 공간에 실재하는 인물이라는 점과 피터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브리짓의 시선은 이후에 논의할 영화 전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운명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작은 구조처럼 보인다.
또 다른 운명론적 장치에 대해서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유전이라는 모티프가 작동하는데, 장례식 시퀀스에서 끊임없이 애니의 어머니, 애니, 찰리가 연결되면서 그들에게 강력한 종속관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례식 시퀀스의 직전 쇼트는 오두막에서 막 일어난 찰리의 모습이고 그에 바로 이어 돌아가신 할머니의 영정사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어 추도문을 낭독하는 애니의 뒷모습이 나타난다.
그런데 추도문의 내용이 일반적인 추도문이라기엔 생전 어머니와의 거리가 강조되는 추도문이라는 점에서 애니 혼자서만 뒷모습으로 연결된 것에 대한 한 가지의 해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추도문이 낭독되는 동안 찰리가 관 속에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이 제시되고 그 시선은 바로 애니에게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른 조문객에게 한 번 시선이 돌아간 후 다시 낭독하는 애니의 모습이 등장한다.
낭독 과정에서도 애니의 정면 숏은 피터와 남편의 모습을 거쳐서 찰리에게 도달한다는 점과 찰리와 애니와의 연결에 앞서 찰리가 그린 악마적인 모습의 애니가 먼저 제시된다는 점에서 찰리는 애니보다 할머니와 더욱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져다준다.
애니의 롱숏에서 애니의 바로 옆에 아주 큰 사이즈로 애니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있는 것 또한 그녀와 찰리의 연결을 강화시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이어 한 조문객(이후의 내용을 고려하면 파이몬의 추종자로 추정되는)이 고인의 입술이 무언가를 바르고 지나가는 쇼트에서 그 조문객을 관 속 고인의 모습과 프레임 오른쪽 끝에 걸려 있는 찰리의 머리가 에워싸면서 셋이 연결되고 입술에 무언가를 바르는 행동과 찰리가 입으로 초콜릿을 베어 먹는 행위가 연결되어 그 연결성을 훨씬 강화시킨다.
집에서도 이러한 구조가 이어지는데, 찰리를 재우러 온 애니와의 대화에서 찰리에 대한 할머니의 각별한 사랑, 할머니에 대한 찰리의 의존이 드러나고 대화 중에도 시종일관 찰리는 애니와 시선을 쉽게 맞추지 않는다.
측면에서 잡은 둘의 투샷으로 분명해지는데 애니는 찰리에게 몸을 숙이며 가까워짐에도 찰리는 돌아서 있으며 애니와 연결되지 못한다.
바로 이어 애니가 어머니의 유품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장면에서도 불을 끄자 어렴풋이 어머니의 형상이 나타나고 그에 놀라 불을 켜니 그 형상이 사라진다.
그런데 불을 킨 순간의 시점은 불이 꺼져 있을 때 어머니의 형상이 있던 자리의 시선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어머니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시선을 애니는 인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애니-어머니의 연결의 단절이 한 번 더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애니는 스스로 의도적으로 찰리와 연결되고 싶어 하고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셋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종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극 초반에 끊임없이 강조되는 유전의 모티프 또한 찰리와 할머니의 강력한 연결 사이에 끼어 있는 애니에게 운명적이고 종속적인 힘을 아주 강하게 부여하는 운명론적 장치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애니에게만 유독 단절적인 연결이 나타나는 것은 필히 애니의 무의식과 애니의 '헤라클레스적 비극'에 대한 형상화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유전>은 영화의 초반 드러내기 과정에서 마치 미니어처를 직조하듯 철저하게 영화 속 세계와 인물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 놓은 세계 속에서 철저하게 운명론적인 혹은 의지와는 무관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인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며 비극이라는 운명 속에서 한 개인과 자아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보여주는 파괴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그 과정에서 이성과 의지의 끊임없는 전복을 통해 그 무기력함을 강화시킨다.
대표적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애니의 미니어처인데, 찰리의 사고 현장을 미니어처로 만드는 애니는 사고 현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그것을 만든다고 말한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미니어처라는 것은 본디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만드는 이가 철저하게 통제권을 가진 주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미니어처는 애니가 찰리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자신에게 찾아온 비극을 스스로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투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애니가 자신의 작업물을 모두 부수는 장면인데, 찰리의 영혼을 소환한 것이 애니 스스로에게는 위안이 되는 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의식적인 몽유병과 더불어 가족의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맞았다는 점에서 애니가 작업물을 모두 부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시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그 모든 것을 자신이 바로잡겠다는 또 다른 통제 욕구 때문에 모든 비극이 성립된다.
그 이후 애니가 조안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은 애니가 정면에서 걷다가 방향을 틀면 카메라가 패닝으로 애니를 따라가는데 도중에 한 두꺼운 나무줄기가 화면 전체를 양분하면서 지나간다.
이러한 프레이밍은 전경에 거대한 오브제를 추가하면서 시각적인 자극을 주기도 하지만 나무의 줄기가 아주 두껍게 화면을 완전히 분리한다는 점에서 나무를 사이에 둔 양 쪽 공간이 전혀 다른 공간으로 여겨지게끔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숏은 애니가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인데, 카메라는 상하 반전되어있는 프레임에서 시작해 걸어가는 애니를 따라 180도 틸트를 통해 본래 앵글로 돌아간다.
이는 애니가 새로 진입한 세계가 그녀의 의지와는 정 반대로 이루어져 있지만 겉보기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별다를 것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프레이밍처럼 보인다.
이러한 무기력함이 절정에 달하는 것이 애니의 남편이 죽는 장면인데, 애니가 처음 찰리의 책을 태우려 했을 때는 자신에게 불이 붙었던 것을 보고 그 책을 태워서 자신이 사라지게 되면 이 모든 비극이 끝날 것이라며 남편에게 책을 태워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주저하며 경찰을 불러 병원에 보내겠다는 남편에게서 공책을 빼앗아 난로에 던지니 불에 타는 것은 애니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이었다.
애니의 경험적인 학습에 의한 마지막 자의적인 판단이 정 반대로 이루어지며 부정당한 것이다.
결국 애니가 진입한 정반대의 세상 속에서 개인의 의지와 선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무기력한 개인만이 남은 것이다.
그렇게 애니의 모든 것이 부정당해서야 비로소 비극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 거실에서의 시퀀스를 '미니어처적 시점'에서 시작해 롱테이크로 진행시킨 것은 이 미니어처적인 폐쇄되고 답답한 무기력함을 최대로 끌어올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머리가 하나의 상징물로써 작동하는데, 마치 파이몬 의식의 핵심이 머리에서부터 나오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것은 비둘기의 머리인데, 죽은 비둘기의 목을 가위로 잘라내는 찰리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그다음 등장하는 것이 찰리의 머리인데, 이 머리의 등장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대낮에 벌레가 갉아먹고 있는 이미지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관객 모두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직전 쇼트가 찰리의 머리와 반대방향으로 누워있는 피터의 얼굴 클로즈업이었다는 점에서 동일시는 아니지만 그 둘의 힘이 반대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아주 강한 연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본격적으로 파이몬이 소환된 이후 피터에게 빙의를 시도하는 행위는 거울 속 피터가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든지, 스스로 책상에 얼굴을 박는다든지 머리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빙의에 시도한다.
결말부에서는 완전히 악마에게 사로잡힌 애니가 다락 천장에 매달려 수차례 자신의 목을 찌르면서 머리와 몸통을 분리하고, 그 몸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후 비로소 파이몬이 피터에게 빙의된다.
결국 애니에게 깃들어있던 파이몬이 머리와 몸통의 분리를 통해 피터에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오두막에서 파이몬의 신도들은 파이몬의 완전한 부활을 의미하는 아티팩트로써 썩은 찰리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놓은 조형물을 바치고 있다.
이런 머리에 대한 집요한 파괴는 인간의 의지 혹은 이성과 결부될 수 있고,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세계를 구축하는 하나의 장치가 되기도 하면서 처음부터 영화의 주체가 되었던 애니가 목이 잘린 채로 파이몬에게 복종하고 있는 모습은 결국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의 이성에 대한 과신의 결과를 매우 그로테스크하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토록 거대하고 저항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가?
한 개인의 무기력함을 인정하고 운명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기만 해야 하는 것일까?
영화는 이러한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인물들을 비극으로 몰아넣으며 회의론과 운명론의 극치를 향한다.
애니와 피터의 서사에서 약간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애니의 남편은 시종일관 세계에 저항하지 않고 그 속에서의 안정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가장으로써 가정을 유지시키기 위해 미니어처적 세계 속에서의 유기성을 최대한 붙잡으려는 인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미니어처적 시점'에서 프레임 안에 철저히 갇혀있지만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며 장례식에 출발할 준비를 하는 것은 애니의 남편이고 장례식에서 다녀와 가족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한 번씩 방으로 찾아가 상태를 묻기도 하는 등 미니어처 속 세계를 관리하고 유지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무덤이 파였다는 아주 중대한 소식을 숨기면서까지도 평화를 유지시킨다.
찰리가 죽은 이후에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며 세계 속에서 그저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운명론적 세계 속에서 거대한 힘을 두고 그처럼 행동하는 것이 절망적인 상처를 회복하는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역시도 신경안정제처럼 보이는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여전히 무기력한 개인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남편의 행동양식 또한 애니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이성적인 행동양식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역시도 운명론적 비극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지속적으로 운명과 운명에의 도전, 통제 가능한 의식과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 그 둘 모두의 실패, 희망과 묵살 등등 일맥상통하는 모티프들을 통해 영화를 전개하면서 개인의 존재를 아주 작은 티끌의 경지까지 이르도록 무기력하게 만들고 인간이 가진 이성의 통제 가능성에 대해서 아주 강력한 의문을 던지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관점에도 이 영화의 메시지가 유효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취한 형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가 오컬트의 탈을 쓴 드라마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그 책임을 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기본적으로 영화 전반에 걸쳐 컬트적 요소가 깔려있지만 애니가 조안을 만나고 영혼 소환 의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무언가 외부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만 있을 뿐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없고, 그전까지 발생하는 사건들이 어떤 우연, 불운, 비극의 연속이었다는 점에서 관객들이 속한 현실과 영화 속 현실의 분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드라마 장르의 한 유형에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심지어 영화의 후반부에도 파이몬에 관련된 정보는 맨 마지막 시퀀스를 제외하면 책에 의해서 몇 줄로만 단순하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정말 감독이 이 파이몬 의식과 악마적 세계관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오히려 그런 구체적인 세계관 묘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드라마 위에 세계관의 요소를 데코레이션으로 배치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묘사하고 전달하는 '개인의 사소함'에 대해서 그것을 컬트적 세계관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까지도 강하게 던지는 메시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특히 애니와 어머니의 관계, 몽유병, 유산 등등 애니가 가지고 있던 컬트적인 운명에 대한 단서들을 영화의 단계별로 차근차근 전달하면서 우리에게 컬트적인 세계관을 소개하고 애니가 미니어처를 부순 이후엔 리얼리티와 컬트의 주객이 전도되면서 완전히 오컬트 영화로 변모하게 된다.
분명히 이러한 점에서 <유전>은 메시지의 극한을 달리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리얼리티와의 철저한 분리를 꾀해 그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전반에 걸쳐서 오컬트적 요소가 깔려있긴 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보았을 때는 컬트적 발화점이 매우 늦다는 점에서 현실세계에 대한 드라마를 가장한 오컬트 무비가 된다.
그 극화된 우화를 통해 개인의 무기력함과 존재의 사소함을 먼저 바라보게 하는 영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영화의 메시지가 지향하는 방향은 컬트적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던 현실세계를 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차곡차곡 컬트적인 장치를 부속으로 쌓아가다가 한순간에 리얼리티와 오컬트의 주객을 전도시키는 영화의 구조 자체도 우리의 믿음과 판단을 급격하게 뒤집어 놓는다는 점에서 그 이성의 붕괴와 무기력함을 체험하게 해 준다.
그렇게 지독히도 양식화되고 회의적인 세계관 속에서 관객을 뒤흔든 이 영화는 첫 쇼트보다 더한 분절적인 ‘미니어처 샷’과 ‘헤일 파이몬’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쇼트에 바로 뒤이어 흐르는 산뜻한 보사노바 음악으로 마무리하면서 ‘알겠지? 이제 잘 살아봐.’라고 말하는 듯하며 그 절정의 회의주의에 대한 책임을 관객에게 넘겨주고 자신만 유유히 쏙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능청으로 관객들에게 일격을 날린다.
결국 아주 특징적인 두 개의 미니어처 샷으로 열고 닫으면서 영화는 이것이 분명하게도 현실이 아님을 표명하며 그 과도함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 자체를 의미가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쇼트에서야 결국 첫 쇼트에서부터 제기된 영화 속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실마리가 등장하는데, 그 마지막 미니어처 샷이 어둠 속 공간에서 미니어처를 가두고 있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어두운 극장에서 직조된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과 닮아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결국 이것 또한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끊임없이 통제하고 만들어내려 하기도 하고 자신의 시선과 판단 안에 타인 혹은 세계를 종속시키는 '시선의 힘'과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를 한 번 더 거리를 두어 바라보면서 '개인-세계' 사이의 관계를 '영화-관객' 사이의 관계로 환원시키며 관객에게 그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끔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