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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주 Nov 04. 2021

고양이와 하품, 그리고 카나리아

직접 제작한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쓴 반려동물 에세이


<애니메이션 링크>

https://youtu.be/cxobv-D9zwQ



원래 계획은 1분 내지의 단순한 짧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었다. 기초적인 모션그래픽을 배우는 동안 그림 몇 장을 이어 붙여 만드는 로토스코핑 애니메이션 기법에 눈길이 갔고, 배운 걸 좀 더 응용해 보면서 익숙해지고자 했던 것이다.

애초에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고 그려본 적도 몇 없던 터라 그 정도에 만족하는 것이 현실적이기도 했다.


무엇을 그려볼까 고민하던 와중에 들어온 것이 고양이의 하품이었다.

하품이라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고양이들의 하품은 그 특유의 못생기고 익살스러운 표정 때문에 눈길이 간다.

그런데 계속 지켜보다 보니 졸리거나 자고 일어났을 때뿐만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하품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다가 갑자기 그루밍하면서 하품을 하기도 하고, 쓰다듬고 있을 때도 느닷없이 하품을 하는 것이다.

보통 쉬면서 나를 기다리다가 내가 눈길을 주면 하품을 하곤 한다.

언제는 하품을 하고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다시 눈길을 줬는데 연속으로 다시 하품을 하더라.

하품을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내 관심에 대한 단순한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왜인지 무언가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문득 이 녀석들의 하품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궁금해졌다.

단지 생리적인 작용일 뿐만 아니라 어떤 정신적인 것도 담고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어쩌면 그 녀석 만의 좋은 기억과 감정들이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하나의 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더 나아가 하품이란 것은 그들이 하는 행복의 표현, 혹은 그 행복감이 다시 재현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담긴 것으로. 나한테 그것을 전하려는 하나의 발화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관심이 하품을 유발한 것이 아닐까.

내 시선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하품하는 밤


그래서 먼저 만들어본 것이 하품하는 얼굴이었고, 그다음으로 하품 속 세계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입 속의 색깔인 분홍색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배경에 이 녀석이 좋아하는 갖가지 것들이 바다를 유영하듯 떠다니는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대단한 영감은 아니어서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고, 대강 만들고 나니 절반은 만족스러웠지만 너무 짧게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그러던 도중 만난 것이 요네즈 켄시와 ‘카나리아’였다.

만남과 사랑,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오는 권태와 관계의 소원함, 그래도 당신과 함께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따뜻한 음악 속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길에서 자라 가족과 이별하고 병을 앓았지만, 구조되어 비로소 함께할 수 있게 된 녀석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음악이 상당히 많은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다.

특히 음악의 템포나 건반의 주법, 현악기의 리듬 같은 것들이 8 프레임 로토스코핑 애니메이션에 잘 들어맞는 느낌이 들었고, 각각의 선율에 맞춰 음악과 함께 물 흐르듯 흘러가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런 음악적 요소들이 있었기에 비교적 도입부는 어렵지 않게 구상하고 그려낼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다음 이야기였다.

하품과 꿈, 그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음악의 구성을 따져본다면 그것은 필연적 이게도 '하품의 거절'이라는 모티브여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좋았던 기억과 그것에 대한 재현의 기대를 담은 것이 고양이의 하품이라면, '하품의 거절'은 그들의 행복이 일정 부분 거절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켜본 날들을 돌아보면 그런 날들은 아주 많았다.

녀석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일 수도 있고, 그들의 행복의 시간을 항상 맞춰주기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서 일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어쩔 수 없다'라는 말 아래에서 녀석들은 항상 기다리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기다리지 않으면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 대단한 것들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부분을 우리에게 종속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들 또한 기다림에 적응하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또 다른 기다림의 연속이 예측 불허하게 찾아오기도 한다.

어쨌든 그 수많은 '어쩔 수 없어'와 '미안해'라는 말들 아래에서 녀석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기다리는 존재가 되고, 그것에 적응할 무렵 또 다른 '어쩔 수 없어'와 '미안해'라는 수렁 속에 갇히게 된다.

결국 하품의 거절과 그로 인한 기다림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무기력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필연적인 학대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녀석들을 그 수렁에서 꺼내 줄 수 있는 것 또한 우리들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학대자이자 동시에 구원자인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건 무슨 뜻일까?

정말 어쩔 수 없었을까?

물론 정말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어쩔 수 없다는' 말들이 우리의 무능과 나태를 감추기 위해 남발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거기다 알아들을 능력도 없는 녀석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들에게 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에게 던지는 자기 위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어쩔 수 없음'과 거짓된 '어쩔 수 없음'의 간극을 최대한 줄이는 것으로 녀석들에게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얻어낸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가 먼저 말을 걸고 손을 뻗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그들의 언어와 생활을 이해하려 하고, 그들에게 올바르게 말을 걸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어쩔 수 없음'의 예측 불허함을 최대한 줄이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들어가자면 그들에게 최대한 규칙적인 생활 루틴을 보장하는 것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규칙적인 시간에 밥을 먹고, 놀이를 하고 하물며 보호자가 부재하더라도 먹이 장난감을 포함한 여러 가지 환경적 장치를 마련해 그 부재의 충격을 최소화시키는 방식을 모색할 수도 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이들에 대해서 관찰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방식과 언어를 이해하고 그 방식으로 대해주는 것이 이들을 향한 최소한의 존중의 표시일 것이다.

나의 행동을 녀석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녀석에 행동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살피고 알아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평생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은 더욱이 우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를 끊임없이 낮추고 성찰적인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존중의 표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녀석들과의 소통의 창구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별건 아니지만 간단한 코 인사 훈련이라도 충분히 훈련이 된다면 녀석은 적어도 간식을 먹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서로 합의된 방식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양한 언어 표현은 불가능하지만, 이런 식으로 서로의 공통된 언어를 몇 개라도 가지게 되는 것은 녀석들의 종속성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우리 스스로가 항상 부족함을 자각하고 다가가려 노력한다면, 분명히 그들과 우리의 간극은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다.



이런 하나의 서사가 완성되긴 했지만 5분 남짓한 시간에 음악적인 흐름까지 고려한다면 이 서사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결국 선택한 것은 서사와 메시지에 대한 것은 일정 부분 포기하는 것이었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오는데 음악이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 형식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서사와 사유들이 온전히 전달되지는 못할 것이다.


대신, 불완전한 서사를 인정하고 온전히 음악적인 것에 집중하려 했다.

애초에 뮤직비디오라는 것이 음악을 돋보이게 해주기만 해도 성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음악적인 리듬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결과물은 보잘것없지만, 어쩌면 나에게는 도전이었을 이것으로 나를 이끌어 준 것이 ‘요네즈 켄시’와 ‘카나리아’ 였기 때문에 음악에 집중하는 것이 그와 그의 음악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와 존중의 표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악적 요소들을 포착해내고 그것들을 다시 영상 속 요소로 환원시키는 것이 주된 방식이었다.

단출한 건반과 보컬로 시작해 드럼과 베이스가 얹히고 본격적인 현악기의 활용과 그 모든 요소들이 서로를 부드럽게 감싸게 되는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려 했고, 그 속에서 악기들이 가지는 자기만의 리듬을 컷이나 이미지 속 오브제들의 움직임 등으로 표현하려 했다.

물론 그러다 보니 기술적인 완성도와 별개로 너무 많은 요소들을 짧은 컷들에 담아내어 이미지의 과잉이 발생하거나 이미지의 가독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은 아쉬움도 있긴 하다.

그럼에도 음악과 함께 유기체적으로 흘러가는 영상을 만들어보고자 시도한 것에 만족하고 지금 수준에서는 절반의 만족감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음악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영상을 봐줬으면 하는 약간의 바람도 있다.




음악에 조금 더 집중한 탓에 이야기가 명확하게 전달되기 쉽지 않아 보임에도, 이 이야기를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만 남기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그것을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한지도 모른다.

녀석들을 위해서 나뿐만이 아니라 녀석들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고민해 주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던졌다고 생각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이걸 보는 사람들이 이해는 아니더라도 추상적인 감정과 이미지들은 느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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