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냥

A dry cryer's crying

폭싹 속았수다

by 데오잡

시어머니의 고향은 제주도다.

결혼 인사를 드리러 처음 간 제주에서, 시아버지는 흑돼지 화장실을 보고 놀라고 집집마다 드러누운 제주남자들을 보고 놀랐다고 하셨다. 제주에서는 여자팔자보다 소팔자가 낫다 했던가.

바다만 나가면 굶어죽을 일 없던 제주를 떠나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아리고 쓰린 서울살이를 시작한 어린 우리 시어머니.

그래서 이 드라마는 우리 시어머니 이야기다.


키도 크고 성품도 곧은 사남매 중 맏딸.

없기도 정말 없는 모자란 살림살이 때문에 중학교를 일년 늦게 입학해 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닌, 백점짜리 시험지와 푸른 꿈을 서랍에 넣어두고 이력서를 썼던, 19살 어린 우리 엄마.

그래서 이 드라마는 우리 엄마 이야기다.


삶이 모질다. 이리 고단하다.

아둥바둥 발버둥을 쳐도, 나왔다 싶어도 여전히 그 구뎅이다.

넘고 또 넘어도, 또 기다리는 인생의 고비고비에서 손이 터지고 속이 갈라진다.

갖은 애를 다 끓여도 형편은 척박하고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착 달라붙은 가난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여자 사는 얘기는 해도 해도 할 말이 많고, 울어도 울어도 눈물 마를 일이 없다.

관식이라도 만났다면, 다정하게 손 잡아주는 이 하나 있다면 고단한 어깨에 잠시나마 흥이 올랐으려나 싶지만 남편은 남의 편인게 국룰.


그래도 산다.

그래도 살면 살아진다.

속 시원히 풀리는 일 하나 없고, 세상이 죽어라 죽어라 몰아붙여도 또 살아진다.

부뚜막에 가득 놓인 마음들과 얼떨결에 받게 되는 영화관 특별초대권 때문에.

봉황같은 관식이는 못 만나도 핏줄 만큼 살뜰한 이모들과 사나와도 의리있는 민옥이는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눈물 없기로 인정받아 파란 피 소리를 듣던 나인데,

애순이 시가 나오는 거의 첫 장면부터 울기 시작해서 계속 눈물이...

중년의 일상과 피로감 조절을 위해 하루에 한 편만 보고 있는 중이다. 노스텔지어 으흐흐흑


1화에서 내가 너무 사랑하는 소설, 김유정의 동백꽃이 머릿속을 꽝 쳤기 때문에,

작가에 대해서 찾아봤다. 한동안 한국 드라마를 안본 탓에, 작가의 전 작품이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솔직한 제목의 작품이라는 것도 지금 알았다.

아마도 작가님 취향이랑 내 취향 겹...오만과 편견도 좋아하시나요.

동백꽃 발가락 언저리에나마 갈 수 있는 소설을 쓰는 게 인생의 목표여서 작년부터 쓰고 있었는데.

한 순간에 자신이 없어짐...계속 써 말어. 힝.


인간사에 뭔일이 있든 말든 어쨌건 해는 돌고 계절은 바뀐다.

꽃이 피고, 달빛 맑은 밤이 또 잔잔하게 깊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다정도 병인 양하여...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월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