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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경 Apr 08. 2019

경향신문은 이래서 안 된다

자극적으로 제목을 뽑아 미안합니다


#1.

제목이 자극적이긴 하지만 맞는 말이다. 경향신문은 이래서 안 되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경향말고 대부분의 신문 지면이 이래서 안 되는 걸 거다.



#2.

2019년 4월 7일 자 경향신문 오피니언면의 칼럼 <[여적]신문구독료 소득공제>​는 조운찬 논설위원이 썼다.(메인 사진 참조) 조운찬 위원은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는 다른 사람인데, 경향신문의 논조가 드러나는 기명칼럼, ‘경향의 눈’이나 ‘여적’을 쓰는 논설위원이다. 그런데 그가 오늘 신문구독료를 소득공제하자며 글을 썼다.



#3.

신문구독료를 소득공제해 세금으로 신문 산업을 지탱해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캬, 한국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쉽게 동의하기 힘든 주장일 터다. 조선일보 애독자는 경향과 한겨레에 세금으로 지원하는 게 사촌이 땅을 사는 것보다 배 아플 것이고, 한겨레 애독자는 조중동에 세금으로 지원하느니 차라리 국민 경제라도 살리게 삼성에 지원하자고 할 것이다. 이 말인 즉슨, 스스로 변화 없이, 아무런 발전 약속 없이, 또는 사회적 합의 없이 그냥 신문 구독료를 지원하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해결할 의지가 없어요~^^’란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 경향신문 조운찬 논설위원이 말한 근거는 무엇일까?



#4.

한국 역사에서도 언론은 민주주의의 지킴이였다. 특히 신문은 ‘권력 비판’과 ‘약자 보호’라는 저널리즘의 정도를 지키며 언론의 중심에 서왔다. 일제강점기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것도 신문이었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찍어 보도한 이도 신문기자였다. 신문은 자유언론을 주장하며 ‘보도지침’에 맞섰고 광우병사태·촛불시위 때에도 공정 보도로 불의한 권력에 항거했다. 한국에서도 신문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4-1.

한국 역사에서 언론은 민주주의의 지킴이였고, 신문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이건 신문제일주의의 천명이고, 방송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이젠 시민들에 더 친숙한 인터넷 언론을 못 본 체 하는 어리석음이다. 그 당시엔 텔레비전 방송과 인터넷 언론과 SNS가 있었나? 만약에 있었다면, 한국 역사에서 민주주의를 지킨 이들은 시민들이었을 것이다.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거리로 나가 아프리카TV나 유튜브, 패이스북 생방송을 띄웠을테니까. 절대 그 당시의 신문이 똑똑해서, 또는 잘 나서, 아니면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희망이어서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게 아니라, 그 당시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언론, 또는 매체, 또는 플랫폼이 신문 하나였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를 거저 받은 것이다. 그 당시 민주주의의 수문장이 자기들 자신이었다고 신문이 생각한다면, 이는 오만이다.



#5.

그러나 신문의 위상은 흔들리고 있다. 신문구독률은 1996년 69.3%에서 2017년 9.9%로 급격하게 추락했다. 스마트폰과 SNS 등 뉴미디어 확산 때문이다. 또한 신문사 재정의 대부분이 재벌 광고에 의존하면서 자본으로부터의 편집권 독립이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신문이 ‘가짜뉴스’를 막고 언론의 정도를 갈 수 있도록 정부 지원책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신문구독료 소득공제를 대안으로 제시해왔다. 신문이 공공재적 성격이 큰 만큼 세제 혜택으로 많은 독자가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미국, 유럽에서는 세금으로 구독료를 지원하고 있다.



#5-1.

먼저 생각해 볼 것. 신문의 구독률이 추락한 것이 뉴미디어의 확산 때문인가? 정확히 말해보자, 지면의 구독률이 추락한 것이 뉴미디어의 확산 때문인가? 그럴 개연성은 존재한다. 종이 신문, 텔레비전 뉴스, 라디오 뉴스, 잡지, 책 등 옛날부터 있었던 즐길 거리는 게임, 영화, 음악, 웹툰, SNS 등 새로이 즐길 거리가 나오면 나올 수록 설 자리를 잃는다. 인간의 시간과 관심이란 자원은 유한하니까. 그 유한한 자원을 나눠 먹는 놈이 많이 등장하면 할 수록 신문 지면의 설 자리는 좁아진다. 그러니 뉴미디어가 생겨서 지면의 구독률에 영향을 줬다는 말까지는 인정한다. 그러나, 구독률이 떨어진 원인을 뉴미디어에 돌리는 건 애꿎은 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자와 후자 모두 비슷한 말이지만, 경향신문을 안 읽는 게 인터넷 때문인가? 말이 안 된다. 인터넷이 없었어도 경향신문을 읽었을까? 사람들은 재미가 없으면 읽지 않는다.


그럼 신문사 재정의 대부분이 광고에 의존하면서 자본으로부터의 편집권 독립이 시급한 과제가 된 것은? 그것은 구독료에 의한 재원보다 광고에 의한 재원이 더 쏠쏠하다는 것을 안 신문들이 시민보다는 자본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써 왔기 때문 아닌가? 자본에 기대다 너무 기울었다고 느낀 나머지 헐레벌떡 몸을 일으켜 봤지만 기운 몸을 주체할 수 없는 형국이 딱 지금 아닌가? 그걸 지금 신문이 가짜뉴스를 못 막는 이유로 들먹이고, 언론이 정도를 못 걷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설명하면, 이건 뭐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 다른 딱 그 상태다. 너네 원래 그렇게 살아왔잖아! 근데 그렇게 더 못 살겠다고 선언하고 정부에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6.

물론 나는 언론의 공공성과 공익성에 대해 재고하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들에게 공공성과 공익성을 보장해 줄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모든 언론이 KBS나 연합뉴스처럼 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향에서 조차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 세금 좀 지원해주소’하고 떠드는 언론사 중 진짜 그럴 자격이 있는 곳은 얼마나 될까? (나는 신문사 중 경향을 제일 좋아한다.)



#7.

신문과 뉴미디어 얘기는, 택시와 카풀 논쟁과 일면 비슷한 부분이 있다. 기존 산업이 새로운 산업의 등장으로 위태로워지는 것, 그래서 새로운 산업과의 타협안을 찾으려는 시도. 신문은 뉴미디어에 뛰어들어 푼돈이라도 건져보겠다고 발버둥치지만 택시는 카풀에 뛰어들지 않고 버틴다. 둘 다 시민의 호응을 얻는 것 같진 않다. 택시 산업 내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자본 배분 구조 등은 나도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새로운 산업의 진입을 무턱대고 방해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신문도 마찬가지라서, 신문 산업 내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자본 배분 구조는 정말 문제이고, 그와 동시에 뉴미디어에 아무런 전략도 큰 그림도 없이 뛰어들어서 근시안적인 콘텐츠밖에 못 내놓고 있으면서 만족하는 저들의 모습도 매우 문제적이다.



#8.

기본적으로 세금이 지원되는 곳에는 공공의 책임 부과되어야 하고, 공적인 감시를 받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방안을 곰곰이 생각해 내놓으면 모르겠으나, ‘신문이 민주주의를 지켰잖아!’라고 하면서 세금을 달라고 한다면 나는 줄 마음이 없다. 안 돼,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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