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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수 Feb 13. 2020

003엄마, 14시간의 폭격을 의연하게 대처한 함장처럼

<캡틴 하록>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겠다. 내가 상상하는 장면은 그렇다. 

선장은 캡틴 하록 풍의 코트를 입고 한쪽 다리를 꼬고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 한 손에는 책을 들었는데, 그 팔꿈치는 팔걸이에 얹혀 있다. 엉덩이와 허리를 의자 끝까지 넣어 붙여서 단단히 앉았지만, 상체는 책 쪽으로 약간 쏠려 있다. 책에 집중하고 있으니까. 부하들은 혹시나 특별한 명령은 없는지 선장을 흘끔흘끔 살피지만, 선장은 여전히 책에 집중한 채 특별한 명령을 하달하지 않는다. 그러길 몇 번 하고 나니, 부하들도 흘끔거리길 멈추고 각자 할 일에 몰두한다.     

 

 2차 대전 중, 독일군 함장 오토 크레치머의 일화다. 그의 잠수함은 혈혈단신으로 적선에 둘러싸인 채 14시간 동안 집중포화를 받는다. 해저 90m, 14시간의 폭격, 절대 고립과 공포와 고독, 그럼에도 그는 한 명의 부하도 잃지 않고 모두를 무사귀환 시킨다.         


 나의 유년은 8할이 고통이었다. 그 고통의 대부분은 내 것이 아니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 시작된 전쟁 통에 많은 자녀의 어머니로서 치른 고생스러운 삶 때문에 죽어서라도 남편 곁에는 묻히고 싶지 않다 하시던 조모의 고통, 세상 물정을 알기 어려운 스물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눈과 얼굴을 잃은 부친의, 인과율 안에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불운한 고통,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조금도 자신의 것으로 감당할 줄 몰랐던 모친의 신경증적 고통을 어린 내가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짐 지울 의도가 없었을 테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이제야 생각이 자라는, 온전한 판단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에게 보호자의 말은 이상스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나는 모두의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랑 주는 존재에게 의존하고 싶은 욕구는 애정이 결핍한 여성이 엄마가 되었을 때 쉽게 거부하지 못하는 유혹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희생과도 같은 내리사랑을 칭송하지만, 자식은 그보다 더 많이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가 웃어주어도, 부당하게 화를 내도, 맛있는 걸 주어도, 맛없는 걸 주어도... 그 어떤 것을 주어도 아이는 엄마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게 끝없이 조건 없는 사랑을 처음으로 받아 본 애정에 주린 엄마는 아이에게 자신의 온갖 슬픔과 분노를 털어놓고, 아이는 거꾸로 사랑하는 엄마를 보살핀다. 아이다움, 천진난만하게 기뻐야 할 아이의 생기는,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엄마의 애정 욕구에 시들고야 만다. 나의 유년과 마음은 그렇게 시들고 말았다.     


 아들 유아식을 할 때의 일이다. 아들은 고작 20개월이 조금 넘은 아기. 하루 8시간 산책을 하고, 옷은 3~4벌은 갈아입으며, 안아줘야 잠을 자는 통에 체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식성은 또 어찌나 까다로운지, 그 와중에 장을 봐와서 잘게 다져 반찬을 만들었건만 한사코 먹지 않겠다고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말귀도 못 알아먹을 아기에게, “왜 힘들게 만든 음식을 먹지 않아?”라며 소리를 지르고는 침대에 홱 돌아누웠는데, 그 작은 꼬마 아기가 바로 그 반찬통을 들고 와 엄마를 흔들며 간곡하게 눈을 마주쳤다. 그 눈에 정확히 이 말이 들어있었다.

 ‘내가 이거 먹을 테니 그러지 마세요!’      


 모친의 세상은 도무지 착한 자신과 그런 자신을 괴롭히는 악인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항상 화나고 슬퍼 있었다. 나는 그 일방주장의 착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동정만 해주던 유일한 구원자였다. 내 동심을 갈아 넣어 모친 구원에 힘쓴바, 중년의 나는 아직도 자주 우울하고 불안하다. 그랬던 어린 날의 나를,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 내 아들이 하고 있었다, 맛없는 음식을 한 것은 나라고, 화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건넸지만, 그 어린 아기가 알아들었을까?      


 자신의 감정을 완벽히 감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쉽게도 나는 어려서는 감정을 감당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지만, 엄마가 되어서는 알았다. 내 감정을 자식에게 감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엄마도 슬프고 화날 수 있지만, 그것이 아이의 세계로 퍼져나가 아이를 잠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이는 마냥 기쁘고 신나야 하는 존재임을. 슬픈 일, 화나는 일에도 종국엔 디즈니적인 꽉 막힌 해피엔딩이 있는 척이라도 해줘야 함을. 그렇게 아이의 천진한 세계를 지켜줘야 함을. 아직 말이 유창하지 않은 어린이가 겪은 일은 말로 생각으로 기억되지 않고 몸과 마음에 감정으로 새겨져 일평생을 간다는 것을. 걱정 없이 살아본 아이는 인생사가 힘든 일이나 원치 않는 일이 대부분이더라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요, 인생은 가 볼 만한 여정이라고 용감하게 받아들이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음을.          


 사실 그 함장은 그랬다.

그의 손에 들려진 책은 위아래가 뒤집혀 있었다.

그 또한 두려웠지만 두렵지 않은 척을 했다. 그가 감당한 절대의 고독과 공포가 부하 전원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엄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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