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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수 Jan 16. 2020

001. 엄마를 떠올리면 눈물부터 나야 되는 줄 알았다

 “탄성, 기억나?”

 “홀쭉한 레깅스에 엄마 코끼리 다리 다 들어가는 거?”

 “그렇지, 내가 그거 입고, 이어폰 끼고 러닝머신 위에서 열심히 뛰었어. 그런데 꾸르륵꾸르륵 느낌이 안 좋더라. 멈추자니 내가 좀 멋있어서 그냥 달렸거든. 그런데...” 

7살 꼬마 아들이 뒤척뒤척 잠 못 들고 시무룩했다. 물어 물어보니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사소한 갈등이 있었다. 이럴 때 밑도 끝도 없이 웃기려면 방귀나 똥이다. 성별 불문하고 꼬마들에게는 99.9%의 확률로 먹힌다고 자부한다. 역시나 흐리멍텅 힘없던 아들의 눈빛에 총기가 돌기 시작했다.     

 

 ”뿌우웅, 내 귀에도 들리더라.“

 ”우하하하하하“ 

드디어 아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냥 뛰었지. 방귀 안 뀐 사람처럼.”

 “우하하하하하” 

아들이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린다. 역시 밑도 끝도 없이 웃길 때는 방귀나 똥이다. 비록 숙녀의 품격에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시무룩한 아들이 웃을 수만 있다면야!     

  

  “엄마가 보고플 땐 엄마 사진 꺼내놓고~”


 당시 이 곡의 “엄마가~”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 버튼이었다. 이 곡은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맛깔나게 진행했던 군대 방문 예능의 BGM이다. 무대 뒤에 계신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자잘한 힌트를 주면, 군인들이 올라와 어머니 맞추기에 도전했다. 매 회마다 “뒤에 계신 분은 저희 어머님이 아니십니다.”라며 재미난 개인기를 보여주려고 올라온 사람들이 반드시 섞여 있었다. 힌트마다 아들들이 추려지고 최종적으로 어머니와 상봉한 아들은 엄마를 끌어안고 꼭 울었다.      


  군 복무기간이 3년인데다 열악한 시설에 구타가 버젓이 허용되던 험한 시절이니 엄마가 서러울 정도로 보고 싶긴 했겠다. 그런데 이런 사정이 아니더라도, “엄마”라고 하면 눈물부터 흘리는 어른들이 꽤 보인다. 할아버지가 된 가수의 인생 다큐였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홀로 힘들게 키웠노라며, 자신에게는 밥을 차려주고 당신은 위장병 때문에 물에 만 밥을 힘들게 드셨다는 옛일을 상기하며 눈물을 보인다. 가수로 성공했지만 아내와는 이혼을 했고, 딸을 사고로 잃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커서 이루게 된 가족까지 인생사에 슬픔이 차고 넘친다.           


  내 시부님도 “엄마” 하면 눈물부터 훔친다. 그럴 때마다 시모님은 서슬퍼랬던 당신의 시모에 대한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린다. 명절마다 아들 둘을 업고 지고 담배 연기 자욱한 시외버스를 두세 번 갈아타고 힘들게 시골집을 방문할 때면, 시모의 시모님은 늦게 왔다는 타박으로 시작하여 불을 때야 하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으로 어린 도시 며느리를 몰아넣고는 나 몰라라 했다는 오프닝으로부터 호되고 고약했던 시집살이를 연대기식으로 회상한다. 그렇지만 시부님에게는 여전히 당신의 “엄마”는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부터 나는 애처로운 존재다. 이런 사랑은 대체 어떤 사랑일까?

 

 랜디 포쉬의 <마지막 수업, The Last Lectures>이라는 책이다. 실제로 작가 인생의 마지막 수업을 담았다. 그는 공학자이자 건장한 중년 남성이었고, 어린 세 자녀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암에 걸린다. 그는 남은 시간을 분노와 원망으로 보내지 않고 어린 자녀들이 자라서 볼 수 있도록, 아버지로서 전수하고 싶은 인생의 지혜를 기록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온 책이다. 이 책과 수업은 울림이 컸고, 인기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에도 출연하게 된다. 그는 암 환자지만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팔 굽혀 펴기로 증명했다. 군살 없이 근육 잡힌 몸매가 단정한 셔츠와 날이 선 바지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가 자식에게 전하고 싶었던 수업 중 하나는 자신의 엄마와의 기억이었다. 그는 자신의 엄마를 소개하는 사진으로 해변 백사장에서 소년에게 머리채를 잡힌 여성을 꼽았다. 꼬마는 6살 정도로 보였고, 엄마는 고슬고슬한 금발이었다. 엄마의 “머리끄덩이”를 잡은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가 아니라, 6살 아이에게 걸맞은 장난으로 교감하는 엄마와 아이의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공학박사 학위를 받아 온 날, 마침 집에 와 있던 엄마의 손님들에게 엄마가, “아들이 박사 학위를 땄어요. 사람들 고쳐주는 (의학)박사는 아니지만요”라고 농을 하셨노라며, 엄마를 유쾌하게 기억하였다.     


 한때 나도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부터 흘려야 하는 줄 알았다. 희생의 은혜를 베푼 고마운 당신에게 보은하기를 한시라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해서, 엄마의 엄 자만 들어도 눈물부터 흘려 그 성실함을 증명해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아들에게 나는 엄마 하면 웃음부터 나오는 사람이고 싶다. ‘우리 엄마는 참 웃겨!’ 라며, 얼른 집에 가고 싶어 지면 좋겠다. 군 생활 중에도 엄마 얘기가 나오면 엄마가 해 준 웃긴 얘기가 기억나서 힘든 중에도 개그 의지가 샘솟았으면 좋겠다.     

 

 그냥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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